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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와 바다가 싫은 사람

마음은 어디에 얹혀야 흘러가는가, 누가 누구에게 연주를 건네는가

by 유진

우선, 오늘의 단어를 나열해 보자.

편지, 바다, 나풀나풀, 뙤약볕,
우산, 베이지 셔츠, 단내, 나무 그림자,
히비스커스, 병아리콩, 프로코피예프.


그럼, 어제의 추억을 정리해 보자.

하늘색, 반팔 카라, 레몬맛 히비스커스,
딱딱한 김밥, 커피 3잔, 쉬니트케 1악장,
숲길, 신호등, 고민, 9시 24분. 울적. 발송!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 3악장의 도입부 바이올린을 따라가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이 소리선은 참 편지지 위의 실선과 비슷하다. 한 음씩 조심스럽게 얹히는 그 흐름은, 마치 마음의 말을 어디에 어떻게 붙일지 고민하는 손길 같다. 우리는 아트숍이나 문구점에 가면 쉽게 편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 형태와 디자인은 디자이너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어떤 것에 말을 얹을까 이리저리 고민하다 보면, 손안에 한두 개는 금세 잡힌다.


가만 보니, 클래식 앞뒤에는 항상 편지가 있다. 실제로 좋은 연주를 들려준 연주자에게 건넬 편지를 적어본 적도 있었고, 곡이 다 끝난 뒤 잊지 않으려고 속기사처럼 마음을 이곳저곳에 타닥이니, 그것이 발신인과 수신인이 모두 ‘나’로 지정된 또 하나의 편지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편지지를 수령했는가? 아무래도 연주겠지. 누군가가 보낸 정제된 감정의 언어, 그것이 내게는 한 장의 편지처럼 닿았다.


요 근래 내가 관람한 공연은 2중주, 4중주, 혹은 협연 무대가 많았던 것 같다. 다뤄지는 악기의 개수는 중요하지 않다. 프로들은 소리를 하나로 집중시켜 관중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내가 딱 잡고 있어야 하는 중심은 한 가지다. 일단 그렇게 들리도록 작곡가들이 작곡을 하기도 했다! 당신은 불협화음이 듣기 어려운 것만큼, 연주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가? ‘의도’를 통해 도출된 의도적인 불편함과 삐걱거림은 그 자체로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연주를 못해서 삐익-끼익-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면, 연주자들이 기호와 어울리지 않는 음들을 얼마나 정제되고 정확하게 도출해내는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가는 보통 현대음악이나 불협화음을 전면적으로 앞세운 레퍼토리를 꽤 많이 다룬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불편한 음들을 누적해서 듣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일종의 적응, 혹은 훈련 같은 것이다. 마치 어떤 언어를 처음 배울 때 낯선 억양이 차츰 귀에 들어오는 것처럼. 매일같이 듣다 보면 조금씩 들을 만해지는 게 신기하다. 그리고 클래식의 세계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방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장르라, 상상도 못한 상상력을 발휘한 예술가들의 곡들이 끊임없이 많다.


우리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면 느낄 수 있는 ‘이게 뭔데, 나 뭐 느껴야 돼?’ 싶은 전시물들, 그 감정을 ‘현대음악’을 통해서도 아주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계속 듣게 된다. 보통 불편하면 안 듣게 되지 않는가? 물론 나는 실제 공연에서 연주자의 해석을 눈치채고 싶어서 듣는 거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냥 그 순간에 맞는 무드를 찾고, 이 장르에서 얻을 수 있는 진짜 ‘교양’과 흥미로울 가능성을 얻기 위해 공연장에 발을 들이고 클래식 곡을 고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불협화음이나 낯선 20분짜리 곡들과 우리가 굳이 친해져야 할까? 클래식 말고도 재밌고 사람 냄새 나는 장르가 얼마나 많은데. 공연장에서 쥐 죽은 듯이 앉아 지켜보는 것이 뭐가 재밌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내 안에 클래식은 반 장의 편지이자,
두 뼘의 바다를 닮았다.
둘 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품은 채,
고요한 표면 위에 마음을 띄운다.
무엇이 편지이고 바다인가?


1. 편지

당신은 편지를 써보셨는가? 어떤 마음에서 ‘편지’를 써야겠다고 다짐하였는가? 작은 종이 앞에 앉았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괜히 둥둥 떠다닌다. 표면은 일직선상으로 정갈하게 펴져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쓰기 전까지, 내가 펼쳐내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쓰는 이조차 뭘 담아낼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니 더 흥미롭다.


다만 확실한 건, 편지는 보내는 이가 있고 받는 이가 있다는 점이다. 계기 자체는 모두 다르겠지만, 그 어떤 대화보다 ‘축복’과 ‘염원’을 많이 가둬둔 형태라고 생각한다. 무엇으로부터 염원하는가? 개인의 내면 안에 있는 못 다 한 ‘감정’을 자신이 학습한 ‘언어’의 형태로 표출해 종이에 마음을 전이시켜 ‘염원’한다.


바흐, 베토벤, 야나체크 등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곡 비하인드를 자주 보다 보면, 한두 가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생각보다 위대한 뜻을 품고 음표를 그려내지 않았다. 자신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꽤 많았다.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헌정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혹은 업적을 남긴 기존 작곡가를 존경하여 자신의 곡 안에 새겨 넣었다. 또, 못 다 전한 혹은 넘쳐흐르는 사랑의 감정을 휘갈기기도 했다.


한 줌의 다짐과 몇 번의 끄적임으로, 내 ‘여기’에만 존재하던 것이 눈앞에서 ‘존재’하게 된다. 쓸 때는 한껏 몰입했다가도, 되돌아보면 부끄러워져 황급히 종이를 반틈 접어 편지 봉투 안에 넣고 작은 접착 스티커로 밀봉한다. 엄지로 꾹꾹 눌러 강제 종료해 본 적 있는가? 여분이 있지 않은 한, 정말 끝이다. 완전한 종결. 단지 밀봉했을 뿐인데, 이 편지의 초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편지는 시간 속에 던져진 것을 품어낸다. 쓰는 순간, 감정은 이제 언제 닿을지 모를 누군가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내가 현재의 마음을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끝이 나는 움직임이겠다.


다만 끝이란 게 있을까? 편지를 받은 자는 타인의 온전한 감정을 눈앞에서 목도한다. 내용과 감정의 밀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 그 편지를 열어본 당분간은 의미를 곱씹게 될 것이다. 꽤 오래.


나만 해도 기억에 남는 편지 하나가 있다. 고등학생 때 일이다. 서류 전형에 붙은 학교의 면접을 보러 갔는데,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나왔다고 생각해 다음 날 내내 학교에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친했던 국어 선생님이 말을 건네도 기분이 가라앉아 울적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꼬박 지나, 야자 시간쯤이었나. 친구가 노란색 공책을 뜯어낸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우린 친한 사이였지만,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날에 편지를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그 안에는 그때의 나에게 꼭 필요했던 따뜻하고 담백한 말들이 가득했다. “네가 우는 걸 보니까 나까지 마음이 안 좋아.” 이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어디 있나. 그때의 편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지갑 안에 들어 있다. 요 근래는 지갑을 잘 안 들고 다녀서 늘 눈앞에 둘 순 없지만, 아마 그 노란 편지는 평생 그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이렇기에, 가장 진심이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말씨들이 가득한 것이 편지이고, 또 클래식이라고 생각한다. 클래식의 모든 것에는 의도가 있다. 의도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우리는 종종 긴 말로 포장하지만, 결국 마음속 핵심은 한 문장으로 응축되기 마련이다. 그 응축된 의도가 클래식에도, 편지에도 담겨 있다.


그러니까 나는 반틈의 편지라고 생각한다. 더 내용이 궁금하다면 직접 종이를 들어 펼쳐보아야 한다. 그 길목이 다소 낯설어 보여서 그렇지, 생각보다 편안하고 유쾌한 ‘소리’들이 가득한 놀이터다. 백조의 호수와 무도회의 왈츠 같은 화려함과 우아함만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터를 닮았지)


2. 바다

클래식은 두 뼘의 바다만 같다. 대략 사람이 손 두 개를 활짝 폈을 때의 거리 정도 되겠다. 왼손의 엄지로 시작해서 오른손의 끝손가락까지의 간격이다. 이 기회에 손바닥을 뒤집어 쫙 펴보면 좋겠다. 울긋불긋하고 하얗게 손주름이 촘촘히 박혀 있는 아래가 드러난다. 최소한 내 시선 안에서는 꽤 길쭉하다. 그것을 조금 펼쳤다고, 마디 사이마다 은은한 자극이 온다.


연주를 자주 감상하다 보면, 연주가들의 손에 시선이 많이 간다. 특히 현악기 연주자들은 활과 손으로 현 위를 오가지 않는가. ‘오간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거의 춤을 추고 기교를 부린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소리가 공간을 진짜 잡아먹는 순간은 빠른 패시지보다는 느리게 천천히 그어내는 감정선인 것 같다. 빠르고 화려하면 내가 끼워 넣을 틈이 좁아지고, 사람을 멍하게 만들기에 재미는 있지만 숨은 없다.


천천히 여유 공간을 가져가면서, 내 앞에서 촘촘히 그어지는 것을 보다 보면 이게 수평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전에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 공연 때 처음 느낀 건, 소리가 수평과 수직으로 서로 다르게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딱 들어보면 안다. 어떤 건 자꾸 아래로 꾹꾹 내려가고, 어떤 건 파동 치며 앞으로 기어나간다. 처음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 1번을 들었을 때는 낯설어서 죽을 뻔했는데, 한 뼘씩 한 뼘씩, 시간이 날 때마다 귀와 악수를 시켜주니 공연이 끝나고 나서 글 앞에 섰을 때 이 말이 툭 떨어져 나왔다.


시작이 날카롭다. 성당의 공기가 느껴지는 서늘함. 깊게 파고들어 올라와 단숨에 찌르는 듯한 느낌. 무심한 듯 서정적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속도감 있는 연주는 단박에 집중시키는 힘을 느끼게 한다. 공간과 음을 충분히 기다리며 울리는, 선명하고 톤 다운된 차가움. 서서히 가라앉다가도 음을 흔드는 연주는 이 악장의 이해도를 충분히 보여주는 듯했다. (제1번 1악장 Grave. Lento assai)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명동대성당 리사이틀을 다녀온 뒤 썼던 리뷰의 서두다. 분명 그때 현악기에 눈이 돌아갔던 게 2024년 7월, 이 글을 썼던 게 2025년 대략 1월이다.


만약 7월의 내가 이자이를 듣고 나서였다면 어떤 글을 썼을까.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다. — 분명 엉망일 테니 — 정말 손마디 정도씩 걸어오는 길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안 들렸던 게 들린다. 음이 얼마나 잘 표현되고 있느냐의 여부보다, 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치고 있는지,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떻게 이 연주에 반영되고 있는지가 보인다.


그 개별적인 인물의 특성을 파악하는 재미가 얼마나 많은지 당신은 아시는가. 그래서 오히려 대형 스타의 연주보다 나와 또래가 비슷한 연주가들의 공연이 요즘은 더 끌린다. 내가 더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을 던져주는 무대가 요즘은 더 즐겁다. 기교가 어떻니, 어디서 상을 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프로그램을 구성한 연주가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하다. 이 곡을 왜 택했는가? 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어떤 색감을 가진 연주자이길래 이 레퍼토리가 탄생했을까? 하고 말이다.


파면 끝도 없다. 유년 시절의 이야기까지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잠잠히 그 사람 안에 숨어 있는 바다는 연주로 펼쳐지는 수평면으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두 뼘 정도 되는 거리에서 연주가라는 바다를 바라본다. 손을 푹 담글 수도 있지만, 시작은 해변가 근처의 얕은 물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된다. 파도를 치는 건 그들이지 내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조용히 관망하면 된다. 프로 연주가들은, 충분히 마음을 가진 연주를 보여줄 사람들은 그 정도만 해도 나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준다.


이런 푸르름과 저런 온기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편지와 바다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다만, 나는 그와는 조금 거리가 멀다.

이토록 안온한 것을 어찌 멀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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