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랑크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는 편이 좋겠다
그래, 내 미소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 사람은 가끔—사실 수시로—자신이 무엇에 둘러싸여 있는지 잊곤 하지 않은가? 지금의 내가 ‘지금의 나’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복된 일인지, 그 순간에는 잘 느끼지 못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지금 이 시점이 얼마나 감사한 순간인지를 체감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에 ‘안정감’이 주어지면, 잊고 있던 ‘권태’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곧 내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가치 없는 인간’인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체력도 좋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나’로 돌아오면, 당장 처리해야 하는 귀찮고 성가신, 하지만 정을 앞세워 결국 마주해야 하는 일들을 규칙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그 순간들이 마치 부담스러운 과업처럼 느껴진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당연히 내 품에 있을 거라 믿었던 관계가 ‘순탄하게’ 돌아오면, 이번에는 가지지 못한 관계들에 시선이 쏠린다. 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아는 건 좋지만, 그만큼 바라게 되는 것도 많다. 취미가 많아도 문제다. 나의 경우, 다양한 사람들의 소리를 길게 그려보곤 했는데, 요즘 내가 바라보는 곳은 늘 가까운 곳이 아니라—마치 포수와 투수가 공을 주고받는 정도의—거리감이 있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건 반드시 그만큼 떨어진 곳에 있다고 착각하며, 내 곁에서 묵묵히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을 망각했다.
우리는 모두 자라면서—기억은 희미하겠지만—까꿍 놀이를 해본 적이 있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까꿍’ 하며 웃음을 보여주는 그 놀이 말이다. 아이들은 그 짧은 순간에 까르르 웃는다. 왜 이런 놀이를 할까? 바로 ‘대상영속성’을 배우기 위해서다. 대상영속성이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대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능력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형태가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사라진 건 아니라는 걸 배워왔다. 그런데 그걸 너무 잘 익혀서인지, 뭐든 영원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기도 한다. (나도 그렇다.) 손 안에 무언가를 쥐면 곧바로 다음 스텝의 ‘부러움’이 따라온다. 비교와 만족은 끝이 없다. 사람은 참 단순하고, 참 무지하다.
오늘 아침 느꼈던 잠깐의 권태와 비교감정은, 내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아, 이제 평화로워졌구나. 다시 지겨운 일들의 반복 속으로 들어왔구나. 숙제가 있는 매일이 사실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그걸 또 깨닫는다. 사람은 늘 자기만의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가진 존재 의미를 스스로 인식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사소한 것 하나로 무너지고,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작은 의미로 남는 일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게 사람이다. 그래서 더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유의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는 굳이 선의를 베풀고, 칭찬을 하고, 손을 내민다. 이타주의의 본질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눈에는 “왜 저렇게 나를 위해 애써주지?”라고 보일 그 행동이, 사실은 나를 되살리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이유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내뱉으면, 끝에 남는 건 결국 웅성이는 죄책감뿐이다.
결국 인생은 혼자라는 걸 알지만, 온기는 필요하다. 생명체의 따뜻함이 곁에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비롯된다.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남이 될지라도, 이 순간 잠시 공명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내가 지금 방 안에서 편안하게 이런 주절거림을 쓸 수 있는 것도, 안정이 저 문 밖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연락이 닿지 않는 지인이라도, 내가 ‘필요하다’고 부르면 귀 기울여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평화를 감사히 여기자. 그리고—할 일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