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나아갈 필요 없이
휘발되는 감정과 시야를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좋은 습관 중 하나는, 내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를 들춰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아름답다는 무슨 뜻일까.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는 것. 그렇다면, 순간은? 어떤 일이 일어난 바로 그때, 또는 두 사건이나 행동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를 뜻한다. 사전에 물음 하나를 틱 던졌을 뿐인데, 막연히 알고 있던 의미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묘한 결을 느끼게 된다. 익숙한 단어일수록 사용하는 데 부담이 없고, 그러다 보면 그 단어가 지닌 본래의 무게도 쉽게 평가되곤 한다.
어제는 그런 익숙함을 넘어, 처음 들어보는 단어 하나를 배웠다. 망백(望百). ‘백(百)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아흔한 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세를 앞둔 이에게 주어지는 작고 오래된 이름표. 어제, 한국에서 이 이름표로 불리던 한 피아니스트를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은 하늘로 떠난 메나헴 프레슬러. 53년간 보자르 트리오를 이끌었고, 85세에 솔리스트로 전향했으며, 91세에 베를린 필하모닉홀에 데뷔한 사람. 이런 이력을 가진 이에게 ‘망백의 피아니스트’라는 이름은 그의 생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설명이 된다.
당장 우리들의 91세를 떠올려보자. 내가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생존했다 해도 과연 건강할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첫 숫자가 9인 나이’는 실감보다는 아득함에 가깝다. 큐레이터 이상민 진행자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 생각난다. “일단, 악보를 볼 수 있다는 것부터가 대단하죠...” 꿈이 있고, 순수하게 무언가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눈은 빛난다. 어제 함께 본 프레슬러의 베를린 데뷔 영상 속, 그의 파란 눈동자는 그렇게 맑았다. 껍데기는 노화하지만, 그 안의 열정과 자유로움은 여전했다.
피아노 앞의 그는 완전히 자유로워 보였다. 악기 하나를 마주한 채 모차르트를 논하는 기분은 어떨까. 내 손바닥의 열기가 건반을 타고 퍼져나가는 느낌은? 궁금하지만, 직접 연주하기보단 그 광경을 바라보고 싶은 쪽이다. (크크)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7번 2악장이 흐를 무렵, 기고글 피드백 메일이 도착했다. 아트인사이트에 첫 글이 정식 기고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브런치에는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있어서 무덤덤했는데, 포털 뉴스 카테고리에 글이 떠 있는 걸 보자 살짝 흠칫했다. 그 짧은 놀람도 잠시, 내 앞에서는 망백의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상한 타이밍. 문득 19살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대학 입시 결과를 일부러 외면한 채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 있었던 날. 노래 부르길 좋아하지 않던 나는 넓은 소파에 기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수험 번호를 입력하고 결과 확인 버튼을 눌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결과는 긍정이었다. 웅웅— 스피커가 흔들리고, 둥둥— 노래가 흘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지만, 그 순간에도 반응은 어제의 나와 비슷했다. “뭐지?” 낯선 이름표는 늘 그렇게 예고 없이 다가온다. 기쁨보다는 흠칫. 그럼에도 음악은 흐른다. 간질간질하고, 낯설지만 좋은 감정.
우리는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사람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늘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진전하고 싶어 한다. 내가 아는 ‘진전’은 어떤 느낌일까? 화살표가 내 쪽에서 시작해 앞쪽으로 뻗어가는 방향성. 그렇다면 사전은 뭐라고 말할까. 진전(進展) — 일이 진행되어 발전함. 생각보다 ‘발전’보다는 가볍고, ‘머무름’보다는 흐름에 가까운 말이다. 결국, 일이 울렁—울렁— 흐른다는 뜻. 별거 아니다. 진전한다는 건, 그저 간다는 것.
별생각 없이 만들어낸 일들 속에서 나도 별생각 없이 울렁—거린다. (짱구냐?) 그게 앞으로인지, 대각선인지, 땅굴을 파고 있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음악 하나쯤 옆구리에 끼고 있다면, 그건 충분히 괜찮은 파도다. 요즘처럼 바쁜 날들에도, 나는 그때그때 좋은 마음들을 조심히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많이 바라는 것 같다. 언제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