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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Mar 18. 2024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기억을 환기시키기란 덮어 둔 상처를 이르집는 것과 같아서 힘들고 자신이 역겹기까지 하다. 나는 지금 지쳐 있고 위안이 필요하다.

책의 말머리에 적혀있는 글이다. 아직 내용을 읽기 전, 작가가 왜 이렇게 지쳐있어만 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될 즘, 자연스레 말머리 내용이 떠올랐다. 이 기억을 다 끄집어낸 작가는 매우 지쳐있겠구나. 속에 있는 전부를 휘젓고 쏟아낸 이들은 어딘가 창백하다. 그 창백함이 비친다. 한 소녀의 일기라기엔 처절하고 역사라기엔 한 사람의 생이다. 백만 명이 죽어도 그건 다 한 사람의 사적 죽음이며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던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백만 명의 소녀가 겪었을 비참함은 부단히 한 소녀의 사적 비참함으로 이어진다. 살아남아 소설을 써주셔서 감사하다. ‘글’과 ‘작가’와 같은 단어는 이런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을까.

책을 덮고 부풀어진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산책을 했다. 희망가의 구절이 떠올랐다.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소망이 무엇이냐 소망이 그녀에게도 있었을까. 그 소망이 증언하게 한 것일까. 글이 곧 소망이었을까. 작가는 풍진세상을 만났고 나는 풍요로운 세상에 태어났다. 희망가의 원곡인 복음성가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인가 이 풍요 속에 나는 무엇을 증언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처럼 무언가를 끄집어낼 일도, 지혜도 없는 나는 그저 이런 증언을 많은 이들이 읽게끔 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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