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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Mar 04. 2024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꽃말이 예쁘지 않다고, 영원한 사랑이나 뜨거운 우정 같은 뜻이 아니라 고민 후회 좌절 아쉬움 같은 꽃말이라고 무표정으로 검열해서 뽑아 댄 잡초들은 사실 내가 바라던 꽃과 열매들의 마중물이었어요. 그걸 너무 늦게 알았지만 오늘은 해가 뜨고 내일은 비가 올 것이고 계절은 언제나 돌아온다는 사실로 아쉬움을 훔쳐냅니다. 지고 있던 농약을 내려놓기로 합니다.


이제 나만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합니다.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기로 그리고 덜 째려보기로 합니다.


몰래 담아왔던 꽃들을 여기 두고 갑니다. 자라기는 내 안에서 자란 꽃들인데 뽑고 내팽개쳐 놓은 내 잡초들입니다. 벌레 먹거나 무른 것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내 흙이 묻은 거라 씻지도 않고 내놓습니다. 미리 죄송하고 미리 고맙습니다.


문상훈이 두고 간 흙이 잔뜩 묻은, 어떤 것은 뿌리째 뽑혀 시들은 꽃을 봅니다. 어느 여름에는 지는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돌고 돌아 이번 겨울에는 흙이 묻어 널브러진 시든 꽃조차 아름답습니다.


책의 군데군데에는 그의 자필이 있습니다. 언젠가 문상훈의 영상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그 *연필이 생각납니다. 아마 이 글씨들도 그 연필로 썼겠죠. 책을 읽다 말고 연필을 주문합니다.


꾹꾹 눌러 담기에는 연필이 좋습니다. 흘려 쓰기에도 연필이 좋습니다. 뭉툭해지면 꼭 깎아야만 쓸 수 있는 것이 꼭 마음과 닮았습니다.


오늘 그 연필이 도착했습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청색과 무광의 검은색. 두 자루를 샀습니다. 연필을 몇 번쯤 깎아야 무표정으로 검열해 뽑아 대는 일을 그만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마주할 무수한 몽당연필과

문상훈이 뽑을 무수한 잡초들

무수한 것들 사이에서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합니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잊지 않기로 합니다.  


*블랙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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