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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May 30. 2024

새 집과 새 마음

재주넘기 열두 번째 주제: 새 집과 새 마음

희뿌연 구름 위에 달 가까이 떠있다. 21:39. 아직은 핸드폰이 한국의 시간을 따른다. 하늘에도 길이 있다. 어떤 길에서는 난기류를 만나 휘청인다. 30분 간격으로 잠잠하다가 요동친다. 그럴 때마다 안전벨트를 제대로 착용해달라는 기내 방송이 미세하게 웅얼댄다. 멍멍한 귀와 건조한 눈과 뻐근한 어깨를 가지고 비행기를 따라 휘청대는 마음을 살핀다.

둘의 무게가 맞지 않으면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시소의 모양은 사선. 비행기가 흔들리는 모양은 사선. 누군가와 멀어지는 모양은 사선. 직선으로 곧게 작별하지 않고, 서로를 대척점 삼아 멀찍이 떨어지는 모양은 사선. 팽팽하거나 힘 없이 늘어진 사선들이 우리를 애워쌀 즈음 곧게 뻗은 비행기에 몸을 실는다. 영영 기울어진 채로 갈 수는 없어, 결국 양 날개의 무게를 맞추는 비행기 안에서 결국 맞춰져야 할 무게를 가늠한다.

다섯시간의 비행 중 네 시간이 흘렀다. 소설 두 권을 뒤적거리다 금빛같은 문장 두어개를 발견하지만 그뿐이다. 소설만큼이나 미리 저장해둔 영화에도 시큰둥하다. 잠에 들기에는 불편하다. 어쩔 수 없어질 때쯤 메모장을 연다. 옆을 보니 남편도 메모장에 무언가를 적는다. 2024년 5월 1일부터 문수는 남편이 되었는데, 아직도 서로를 아내, 남편이라 칭하는 일이 꼭 장난같다. 그래도 여전히 ‘문수’ 하고 부르는 말씨가 제일 좋다. 다시 내 메모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꿔둔 꿈, 추려둔 문장이 가득한 메모장을 헤집는다. 누군가 오면 언제든 내어주려고 윤이 나게 닦고, 정렬해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당신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쓰지 않는다” 고. 구태여 설명 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처럼 끄덕이고 싶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암호같이 느껴져서 미묘한 울상을 짓는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써봐야만 알 것 같았다. 중요한 시간은 섬광처럼 번쩍거린다. 대부분의 섬광은 지나고 나서야 섬광인 줄 안다. 번개가 조용히 빠르게 번쩍거리고 난 뒤에야 온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천둥소리처럼. 그 소리를 너무 늦게 알아차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쓰는 것 같다.

섬광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다. 저기 매섭게 타오르는 불빛은 새집. 준비도 없이 맨몸으로 빛을 받는다. 따갑다. 새로운 것들은 보드랍기보다는 따갑다. 설레는 마음으로 새집 침대에 누운 그 날 저녁부터 새집 증후군에 앓는 사람들. 몇 번씩 닦아내고 삶아내야 보드라워지는 새것들. 나트랑에 온 후로 지금까지 두 번의 마사지를 받았다. 첫 번째 마사지사분의 손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어 거칠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져도 굳은살이 배길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째 마사지사분의 손은 부드러웠다. 누가 더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갈수록 거칠어지는 것인지. 갈수록 부드러워지는 것인지. 부드럽고 거친 것은 시간의 일이 아닌지.

몸을 굳히고 다시 몸을 푼다. 몸을 굽히고 다시 몸을 편다. 몸을 찌우고 다시 몸을 줄인다. 마사지 베드에 엎드려 침대 아래로 보이는 불가사리 모형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시간과 돈을 들여 몸을 풀고 펴고 줄이는 이상한 곳에 살고 있다고. 그것도 남의 손과 기구를 빌려. 언제나 ‘다시’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여기서 쓰는 ‘다시’는 기이하다. 베트남 여행의 필수라고 생각했던 마사지가 낯설게 다가온다. 마치 게슈탈트 붕괴처럼. 게슈탈트 붕괴는 요즘 남편이 빠진 단어다. 아까는 게슈탈트 붕괴라는 단어 자체에 게슈탈트 붕괴가 왔다고 한다. 익히 알고 있던 단어도 어쩐지 새것처럼 혀 안에서 까끌거린다. 익숙지 않은 문장은 떫은맛을 낸다. 입에서는 떫지만, 손으로 옮겨 오면 기름칠하듯 흘러간다. 입에서 떫은 것이 손에서도 떫다면 영영 글 같은 것은 쓰지 못할 것이다.

섬광에 잠긴 이 도시는 내가 두고 온 도시보다 두 시간이 느리다. 아직 새것인 혹은 훨씬 전에 두고 온 도시들은 몇 시간이나 빠르고 느리고 비슷할 것이다. 당신은 나보다 보드랍거나 굳었거나 말랐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명백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반면 섬광 속의 시간은 명백하지 않지만 절대적이다.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번쩍인다. 그 빛 속에 새집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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