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넘기 열일곱 번째 주제: 커피에 관하여
"커피 나왔습니다"
그 후 내어지는 잔의 모습을 생각한다. 한 샷만 넣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손가락으로 들어야 하는 작은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큰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 꾸덕한 크림이 잔뜩 올라간 라떼… 같은 것을 떠올리다 보면 카페인에 예민해 한 샷만 넣는 당신, 무더운 여름에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당신, 어느 곳에 가든 메뉴판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설탕 하나를 다 넣어 마시는 당신, 값이 싸고 큰 커피를 쪽쪽 빨아 마시는 당신, 커피를 즐기진 않지만 간혹 고소한 크림이 들어간 라떼는 먹고 싶어 하는 당신… 들도 함께 따라온다.
"코피루왁"
가장 잘 익은 커피 열매만 골라 먹는 사향고양이의 똥으로 만들어진 커피. 아주 귀한 그 커피를 내릴 때는 "코피루왁"이라고 진심을 담아 속삭여야 한다. 여과지에 원두를 담고 잘 끓은 물을 붓 삼아 원을 그린다. 그러는 사이 톡, 톡,에서 주르르르륵. 흐르는 커피 줄기, 커피가 흐르는 동안 코오피 향이 가득 채워진다. 어쩌면 내 삶은, 사향고양이처럼 가장 좋은 열매만을 골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때로는 떫고, 비릿하고, 쌉쌀한 열매가 동반된다. 그것마저 소화해 줄기를 흘려보내야 한다면, 그 코오피를 내리는 동안 어떤 진심을 속삭여야 할까.
"내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라면, 꼭 필요한 당신 옆에 존재하고 싶습니다"
오늘 어떤 하루를 시작하고픈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 중인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알 수 없는 당신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 당신이 커피를 시키리라는 것, 커피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러니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잘 내려진 향 좋은 커피. 내가 아는 것은 둘, 당신이 커피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 내가 커피만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 "코피루왁"이라고 속삭이며 어떤 진심을 담았다는 거.
매일 같은 손으로 커피를 내리지만, 매 순간의 커피가 완벽히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완벽히 다르다는 것을 안다. 매일 같지만, 완벽히 다른 것을 발견하고 나면 ‘지금’이라는 시간이 또렷해진다. 또렷해진 시간에 커피를 건네는 손과 받는 손이 스치며 소리 없이 묻는다.
"오늘의 코오피는 어떤 코오피인가요?"
누군가 속삭인다.
"코피루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