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미자 Oct 18. 2024

아빠는 기억나?

7:51 pm

아빠한테 전화 오는 일은 드물다.

집이 가까워 주말마다 만나니까

따로 통화할 일은 없다.


본가에 가지 않은 주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밥은 먹었냐 잠은 잘 잤냐

혼자 있냐 오늘은 어디 안 나가냐 등

먼 친척에게 돈을 꾸기라도 하듯 서론이 길다.


여러 가지 꽃이 한 데 섞여 뭐가 뭔지 모르겠는 꽃다발 같은 그 질문다발 속에서

아빠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골라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아빠는 언제라도 나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맨 마지막에 둔다.

마지막 말이 '오늘은 어디 안 나가냐'로 끝났고, 그건 약속이 없냐고 물은 거다.


아빠의 연락은 두더지 게임 같다.

빼꼼 나온 그 찰나의 순간을 잡아야 한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 싶으면

눈 깜짝할 새 없어진다.

그래서 놓치면 안 된다.


어디냐는 아빠 물음에 회사라고 하면

그럼 얼른 일해라 하고 뚝 끊거나

자고 있었어라고 하면 그럼 얼른 쉬어라며

냅다 전화를 끊어버리는 사람이다.


극단적인 아빠의 배려에

전화를 왜 그렇게 끊냐며 툴툴댄 적도 많다.


하지만 그건 표현하는데 영 소질이 없는 한 남자가 딸을 사랑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고 난 후,

더 이상 아빠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는다.

또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아빠 두더지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은

맨 뒤에서 찾으면 된다.


오늘 내 스케줄만 묻다가

하루를 다 보낼 기세지만 나는 즐겁게 기다린다.

아빠가 준비한 밑밥질문들이 다 떨어져 가는 타이밍을 알기 때문이다.

.

나는 굉장히 기다렸다는 듯

“나 아무 데도 안 가는데 왜?”하고 물어본다

이미 알고 있다 아빠는 나를 만나고 싶거나

부탁을 하고 싶거나 둘 중 하나다


한동안 머뭇거리다 결국 본론은 꺼내놓았다.

“아니 티를 한 장 사려고 하는데 도저히 혼자는 가기가 좀 그래서~”


만약 이 타이밍에 “아 그래~? 혼자 왜 못가!

가서 구경하고 사면되지”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삐지게 만드는 거다


이 남자의 당일약속이

가끔은 곤란할 때도 있지만 매번 반가운 이유는 얼마나 용기 내서 말한 건지 알기 때문이다.


아빠랑 단 둘이 외출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시간을 지체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부랴부랴 씻고 준비하고 집으로 간다고 했다 (늦으면 늦어지는 대로 가기 싫어하는 줄 알고 시무룩해진다 빨리해야 한다)


차를 타집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가면서 요즘 내가 들은 얘기들,

내가 든 생각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굳이 아빠의 단점이라면 말이 많이 없는 것이고, 가장 큰 장점을 꼽자면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반응을 잘해준다


나로 인해 처음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면 굉장히 신기해하고 “그러냐~?”하며 맞장구를 잘 쳐준다

괜히 뭔가를 더 준비해 가고 싶은 동기부여가 된다 아빠는 나를 배우고 싶게 만들고

성장하고 싶게 만든다


백화점에 도착하고 보니 처음 드는 생각은 ‘나 아빠랑 단둘이 백화점 처음이네’라는 생각이었다

순간, 아주 혹시라도 어색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언제 터 아빠랑 어색했더라...


아무튼 주차를 멀리해 놔서 그런지 우리는 꽤 많이 걸어야 했는데 어색할 줄 알았던 시간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족끼리 무언가 함께할 때

항상 아빠는 조용한 존재였다


우리말을 듣고 있는 건가 싶어서 어깨를 흔들고 “아빠 우리 얘기 듣고 있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빠는 세상사에 관심이 크게 없는 줄 알았고

어떨 땐 정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단 둘이 되어보니 아빠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좋은 감정 혹은 느낀 점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둘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가 말이 많아서 끼어들 틈이 없었나 반성도 하게 됐다


주차장은 만차였고 꽤 북적였다

아빠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느 정도 확실히 정해져 있어서 난 그게 참 뿌듯하고 마음이 좋다


"아빠는 뭐든 괜찮아 그냥 아무거나"라고 외치는 아빠가 아니라서 너무 좋았다.


이것저것 입어보면서

비로소 아빠를 자세히 볼 일이 생겼는데,

키가 커서 그런지 참 옷걸이가 좋았다

자기주장이 강한 배(?)만 제외하고..!


내가 아빠 배를 두드리면서 이거 빼고는 완벽하다고 장난을 치니까

아빠가 이거는 깎아버리면 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전직 과일가게 아조시의 언어유희 절었다..


둘째한테 받았다는 모바일 상품권을 지류상품권으로 바꾸느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까지 올라갔다


알 수 없는 씁쓸함도 찾아왔다 엄청 넉넉하게 살아오지 않아서 혹시 내가 지금 느끼는

아주아주 미묘한 불편함을 아빠도 느낄까 봐, 그러지 말길 바라면서 최대한 밝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밝기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맞을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 습관적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뭘 벌어먹고 사나 백화점에 맨날 오는 건가?

감정 단속을 하지 않으니,  또다시 습관처럼 남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이내 놀라서 관두긴 했지만


일단 춥거나 더울 때 우리를 보호해 줄 집이 있고 무려 차를 끌고 백화점까지 왔으며

옷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행복해지고 싶진 않지만 극약처방으로 내가 자연스레 누리는 것마저도

없는 이들을 생각하며

이 정도면 행복하지 않은가 생각을 해보았다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졌고

비싼 인도요리 식당보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아빠의 취향은 귀엽게 드러나버렸다

뭘 먹을까 물어보자마자 그린티라떼를 먹겠다고 한다

참 한결같다. 아마 그린티 라떼를 먹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됐을 거다

시끄러운 딸들이 "아빠 먹어봐 이거 맛있어" 하면서

추천해 줘서 먹기 시작했는데 자기 입맛에 아주 딱이었나 보다 카페만 가면 그린티라테를 찾는다


그 점도 참 위안이 되었다 별건 아니지만 카페를 갈 때마다 자신 있게 외치는 메뉴가 있는 아빠? 귀엽지 않은가?


아이스크림가게에서 그린티라떼를 찾는 바람에 제일 비슷한 말차라떼를 시켰다

말차라는. 썩 맛있는 게 아닌데 그걸 까먹고 아빠한테 자신만만하게 추천했다ㅋㅋ

한 글자 차이인데 맛이 많이 다르다야 하면서

맛없음을 내비치는 거짓말 못하는 아빠ㅋㅋ




앉아서 라떼를 먹는데 건너편 생선구이가게가 보였다 젊은 부부와 노부부와 아기였다

문득 나도 나중에 우리 아빠한테 저런 행복한 가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때하고 넘겼다


가게 앞에 세워져 있는 생선구이 메뉴들을 보면서 소소한 퀴즈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생선을 추상적으로 설명하면

아빠가 그걸 맞추는 식.


정답은 사실 하나다. 아빠가 말하면 그게 정답!

나는 갈치가 좋다고 하더라도

아빠가 삼치라면 삼치가 맛있는 거다





집에 가려고 지하주차장에 내려왔는데 백화점 출구와 우리가 주차한 구역까지 거리가 꽤 되었다

마을버스로 따지자면 정류장 세 개 정도는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걸을 수야 있었지만 우리는 다리가 아팠다


남한산성에서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풀이며 꽃이며 보면서 오래 걸을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런 인위적인 콘크리트에서 오래 걷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유전자가 그렇다(?)


주차장 내에 순환카라는 게 있었다

정말 살았다 생각했다


순환카가 우리 앞에 도착했고

안내원이 타도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것은 타보지 않아도 왠지 알 수 있는 느낌이었다 하늘공원에서 타본 맹꽁이열차와 같았고

여수여행 때 오동도에서 타봤던

동백열차 같은 것일 거라 짐작했다


와중에 또 바람을 느끼려고

창문은 없지만 암튼 끝쪽에 앉았다


우리는 제일 마지막에 내릴 예정이었고

그러면 꽤 달릴 것 같았다

열차 아니 순환카가 출발하는데 진짜 여기가 주차장인 건지 하늘공원인지 모를

시원한 바람이 계속 스쳤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아빠한테

너무 신기하지 않냐며 얼마나 넓으면

이런 게 있냐고 개방정을 떨었다


그냥 나는 이 기분이 좋았고

소소한 행복이 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쉴 새 없이 떠들며 아빠 얼굴을 살짝 봤는데

아빠도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재밌는 거다ㅋㅋㅋㅋㅋㅋㅋㅋ

분명히 좋아하는 눈치


우리 집은 뭔가 탈 것을 굉장히 즐기고 열광한다 유전자가 그렇다





한참 아무 말이 없길래

아빠가 이제 나한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줄 알고 졸아서 입을 다물었는데


아빠가 먼저 입을 떼었다

“니들 어릴 적에 이런 거 진짜 많이 태웠는디야”

그 말에 기분이 참 좋았다

사실 아빠가 우리를 데리고 정말 여기저기 많이 가주었지만 이런 거 타본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기억난다고?거짓말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철부지 딸내미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 살 때? 기억이 나?”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몇십 년 전이면 몰라도

나는 아직 30해 정도 살았는걸


“그람~ 벌써 쉽 몇 년이 지났는디 이런 거 많이타쓰~” 내가 기억 못 한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져서 대답을 안 할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에서만 있는 아빠였


아빠는 내가 기억 못 해도

당신이 기억한 걸 나한테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또 나중에 여기에 오면

백화점에서부터 멀리멀리 까지 가서

를 세우고 순환카를 타야지


다음번에 탈 때도 오늘 같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빠랑 했던 얘기들

그 기분들이 떠오르면서

몽글몽글 옅은 미소가 올라올 것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빠랑 데이트를 해보니

아빠는 내 생각만큼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불쌍해하거나 짠하게 생각하거나 하는 건

너무 앞서가는 오만함이었던 것 같다


아빠 혼자 영화를 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불안해했던 나는 이제 없애기로 했다

그건 정말 아빠만의 시간이었을 텐데

나 혼자 안절부절못했던 거니까!


아빠는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인 것 같다

있는 그대로 아빠를 바라보고 사랑하고

많은 걸 같이해야지 그리고 기대기도 해봐야지


바람이 시원해 죽겠는데

마음은 따뜻해 죽겠는 그런 날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단상] 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