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수의 딴생각(2)
중앙일보 [더오래]에 기고한 글입니다.
2020.09.19.
오민수의 딴생각(1)
월요일 아침 출근길,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동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응,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 달래. 그것도 엄청 많이.”
“그래서 표정이 그런 거야?”
“뭐 그것도 그렇지만, 원래 월요일 아침이란 게 이렇지 않나?”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 모인 회사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그 동료와 똑같았다. 다들 집세가 오른 것은 아닐 테고, 마치 월요일 아침이란 원래 이런 것이라는 암묵적 합의에 도달한 듯했다.
아주 오래전 이렇게 반복되는 월요일 아침을 무척이나 힘겨워했던 여직원을 나는 기억한다. 그녀는 똑같은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매일매일 데칼코마니 같은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즐겨 하는 것은 인터넷 쇼핑이었다. 한 번은 주말에 집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쇼핑을 한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다가 한 기사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차를 몰고 출근하고, 서둘러 업무 회의에 들어가고,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고, 다이어트를 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하다가, 문득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일, 재산, 휴식, 바쁜 일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목적의식이, 서사적 궤적이 필요해졌습니다.”
2007년 6월 23일, 당시 대선후보였던 버락 오바마가 했던 연설문의 일부였다. 나는 그의 연설문 중 ‘서사적 궤적(narrative arc)’이라는 표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나에게 최면을 거는 주술적인 언어처럼 느껴졌다.
내 삶에 서사적 궤적을 만들어 보라고,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 삶의 궤적을 만들어 보라고, 현재라는 시간을 희생하지 않고 여백이 넓은 여유로운 삶을 실천해 보라고, 그리하여 인생이라는 이름의 흥겨운 초대장을 받은 사람처럼 월요일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진정한 삶이 아닌 것은 모두 파괴해 버리라고.
어제와 똑같으면 서사적일 수 없다. 나는 서사적인 삶을 원했다. 오늘 내 삶이 어제와 달라야 하는 이유였다. 나는 데칼코마니 같은 일상을 파괴해 버리겠다고 결심했고 그래서 어김없이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 쇼핑을 즐기고 있는 그 여직원에게 가차 없이 독설을 날렸다.
“계속 그럴 거면 회사 때려치우고 나가서 쇼핑몰이나 차리지 그래!”
이후에 기억나는 것은 그녀의 어리둥절했던 표정과 진짜로 사직서를 제출했던 일, 그러고 나서 나 역시 회사 인사팀과 면담을 해야 했고 그녀와의 관계를 해명해야 했던 일이 떠오른다. 당시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다른 동료들을 수소문하며 그녀의 이후 행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온라인 마켓에 점포를 입점했다. 다시 말해 진짜로 쇼핑몰을 차리고 있었다.
나 또한 삶의 궤적에 변화를 주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고, 결국 서사적인 삶을 찾아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은 이직을 한다고 해서 월요일 아침이 늘 새롭거나 서사적 궤적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환경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변화였다. 이 단순한 진리를 이직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을 때, 이전 회사 동료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온라인 마켓에 입점했던 그 여직원 소식이었다.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하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사업이 번창해 독자 브랜드를 가진 온라인 쇼핑몰을 오픈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잘 돼서 이제는 사무실도 차리고 정규직 직원을 채용하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이었다.
얼마 후 이전 회사 동료들과 함께 성공한 그녀를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사실 만날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론적으로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과거의 일은 나에게만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마치 추억을 회상하듯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증오심이란 게 없었다.
나는 무엇보다 그녀의 일상이 어떠한지 궁금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데칼코마니 같은 일상에 종지부를 찍고 매일 아침이 두근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하여 월요일 아침마다 벌떡 일어나 서사적 궤적을 그리며 월화수목금을 살아가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그녀의 답변은 예상외였다.
“아뇨. 그때 이후로 월화수목금금금처럼 살고 있어요. 오히려 주말이 날아가 버린 셈이죠.”
성공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살벌한 답변이었다. 그냥 좋아하는 일이니까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한다고 했다. 결국 그것도 반복적인 삶이라 지루할 때도 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기 싫은 일을 할 때와 다르게 늘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고, 떠오르는 영감을 실천하다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그런 삶을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뭔가를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쇼핑몰이나 차리라고 쓴소리를 했던 그 순간에 대한 얘기였다. 분명 기분 나쁜 소리였지만 마치 ‘천상의 소명’이라도 들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더 이상 회사에서 몰래 쇼핑할 게 아니라 진짜로 쇼핑몰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그 순간 구체적으로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천상의 소명이 귓가에 메아리칠 때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영험한 순간일 거라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보잘것없고 간절한 순간에 그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월요일 아침에 만난 내 직장 동료처럼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달라고 하는 순간에도 그 천상의 소명을 들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가난한 젊은이였고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달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천상의 소명을 듣게 되었다. 그는 소명에 따라 자기 집의 빈 공간을 관광객에게 빌려주어 집세를 감당하게 되었다. 이후 자신처럼 집 공간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과 관광객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을 만들어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했는데, 2008년 시작한 이 사업은 훗날 전 세계적인 숙박 공유 사이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에어비앤비의 CEO 브라이언 체스키였다.
나의 월요일 아침은 지금도 반복적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 주변 동료들의 표정을 보면 나와 마찬가지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와중에 천상의 소명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늘 똑같아 보이지만 항상 새로운 영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제와 오늘을 비교한다고 해서 쉽게 알 수 없다. 다만 조금씩 서사적 궤적을 그리며 의미 있는 축적의 시간을 쌓아나가며 성장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처음 삶의 궤적을 바꾸기 위해 지금 있는 곳으로 이직했던 날을 기억한다. 당시 나의 입사 동기는 9명이었고 우리는 똑같이 회사 업무를 하며 똑같이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그 9명의 삶이 서로 똑같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 다른 서사적 궤적을 그리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차를 몰고 출근하고, 서둘러 업무 회의에 들어가고,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고, 다이어트를 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하다가 문득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 재산, 휴식, 바쁜 일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한다. 삶에 의미가, 서사적 궤적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월요일 아침은 조금씩 궤적을 바꾸며 앞으로 나아간다.
멀티캠퍼스 SERICEO 전직지원사업 총괄
오민수
인스타그램 : 딴생각 (oh_minsu)
기사 링크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5&aid=0003036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