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더오래] 기고 칼럼
2020.10.31.
오민수의 딴생각(3)
A는 나를 '오 주임님'으로 기억한다. B는 나를 '오 대리님'으로 기억한다. 아주 오래전 직급으로 기억하는 그들은 더는 나의 부하가 아니라 오랜 벗들이다.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불러줄 때마다 지나간 추억이 소환되고, 어렸고 젊었고 엉망진창이었던 지난날들이 어느새 낭만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조만간 한국을 떠난다는 C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아직도 나를 '오 과장님'으로 기억한다. 수평적인 조직문화의 일환으로 이제는 회사에서 모든 직급이 '프로'로 바뀌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부르기 싫단다. 앞으로도 영원히 오 과장님으로 기억하고 싶다며 아주 오래전 추억 속의 '어느 과장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도 무슨 고백이라고, 듣다가 괜스레 가슴에 스민다. 직급이 초코파이도 아닌 것을 그렇게 정을 담아 불러주었다. "오 과장님, 영원히 기억할게요."
그런데, 나는 그 '영원히'라는 게 두렵다. 나를 '영원히'라는 영역에 가두어 둘 수 없기 때문에 두렵다. 누군가가 나를 불러준다는 것, 그것은 김춘수의 시처럼 그가 나를 불러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에게 다가가 꽃이 되는 일이다. 다만 그 시에서 말했듯 '불러주었을 때'가 '영원히'로 바뀌는 일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돼버린다.
어느 인간도 영원을 담보로 기억 속에 머물 순 없다. 한때 우리가 믿어왔던 모든 인간이 그러했다. '청렴'으로 기억되었던 어떤 인간은 청렴하지 못하여 심판받았고, '정의'로 기억되었던 어떤 인간은 정의롭지 못하여 심판받았으며, '페미니스트'로 기억되었던 어떤 인간은 결국 페미니스트에게 비난받아야 마땅했다.
나는 어떤 인간의 음주사고를 비난했고, 위력이 저지른 성폭력도 비난했으며,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형벌이 가벼워지는 일도 비난해 왔다. 나는 그런 자들의 잘못에 분노하며 시원스럽게 단죄하지 않는 세상의 방식에 치를 떨었지만, 한때 내가 그들을 기억했던 방식에 말문이 막히곤 했다. 말문이 막히면 밀어낼 수 없는 말들이 고스란히 나를 겨냥했다. '너는 뭔데', '왜 믿었는데', '누가 영원히 믿으라는데', '그래서 너란 인간은 뭔데'.
'너란 인간은?' 되묻는 말들이 허물이 많은 나를 건드렸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오래전 대리운전기사가 안 잡힌다는 이유로 음주운전을 했다가 단속에 걸려 벌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후 출근길에 불법 U턴까지 걸리는 바람에 벌점이 가산되었고 결국엔 '면허 취소' 처분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 특별사면’이 시행되면서 면허취소는 풀려버린 적이 있었다.
14년 전인가, 그때는 지나가는 경찰에게 "너희가 진정 민중의 지팡이냐?"라는 진솔한 얘기를 욕처럼 했다가 잡혀가기도 했는데, 그게 무슨 민주 투쟁도 아니었고, 술 취해서 뱉은 취중진담이라서 결국 공무집행 방해로 법원까지 갔으나 '심신미약'을 이유로 가벼운 벌금(7만원) 처벌을 받기도 했다. 어린 시절엔 불법 동영상도 참 많이 다운로드했다. 그 아이디를 따라 추적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게 나올지, 그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충 기억나는 일들만 떠올려 봐도 이 정도인데, 기억이 있더라도 마음속으로만 밝히는 고해성사까지 고려하면 나 역시 영원을 담보로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없는 비루한 인간임을 안다.
이런 나의 과오들이 장난스러운 뉘앙스로 전달될 수도 있지만, 이게 형식이 바뀌면 뉘앙스도 바뀌게 된다. 만약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지금까지 내가 밝힌 잘못들을 읽어준다면, 지난날의 에피소드는 우스운 게 아니라 파렴치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내가 공직자는 아니지만, 어쩌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치를 수밖에 없다는 국정감사나 청문회를 상상해 본다. 아마도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해 온 A와 B와 C는 나를 지지해 줄 것이다. 그들의 지지 속에는 주로 '아름다운 오 과장'이 소환되겠지만 국정감사에서 밝히는 '아름다운 오 과장'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나의 친절한 행적은 어떤 대가를 바랐던 흑심으로 의심받을 수 있으며, 내가 생각했던 일종의 로맨스는 없어도 될 객관성을 마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의심받아 난잡한 치정으로 둔갑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실이 맥락을 상실했을 때 벌어지는 왜곡 현상이 문제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진짜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진실로 한 사람을 정의 내리는 일이 매우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용감한 사람을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날 그는 용감했다"라고. 그가 용감했던 것은 분명한 시점이 있으며 그날에 그의 행실로 칭찬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건이 된다. A와 B와 C가 기억하는 사람이 만약 ‘영원히’ 아름다운 오 과장님이라면, 사실은 '그날 그때' 아름다웠던 오 과장님으로 기억되어야 맞다.
어쩌면 나는 다른 날 다른 때에 비굴했거나, 비겁했거나, 탐욕적이었을 수도 있다. 실은 그랬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청렴한 인간이 아니었으며 다만, 법의 오용과 법을 수행하는 자들의 오만함을 응징하고 싶은 인간이기는 했다. 나는 언제나 선과 악의 영역에서 어느 한쪽에 머물지 못하는 갈등의 연속을 살아왔고, 한편으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강한 신념을 지녔지만 때론 그 신념이 비굴하게 무너지기도 했으며, 때론 누군가로부터 칭찬받을 만큼 용감하기도 했지만, 때론 비난받아 마땅할 만큼 비겁하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누구든 그를 '영원히’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 인간을 그날 그때 죽여서 피를 뽑아 아름다운 박제로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차라리 우상을 숭배하는 방식이어야 맞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말처럼 ‘영원히’ 청렴해야 할 우상이었을까? 아니면 ‘그날 그때’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이었을까?
그리 높고 경건한 경지에 인간을 맞추자면 팔다리를 모두 잘라버려야 하지 않을까? '만약 네 눈이 죄를 짓거든 그것을 빼내어 버려라(마태복음 5장 29절)',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가복음 9장 43절)', '총명한 자라면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 보라 그것은 인간의 숫자니(요한게시록 13장 18절)'.
인간이어서,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한 일에 면죄부를 줘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죄는 단죄해야 옳겠으나, 도덕을 너무 쉽게 남발하는 자들의 도덕이 너무 쉬운데, 그들의 치부는 그리 쉬운 것 같지 않아서, 참으로 그게 가증스러워서, 어쩌면 나 스스로도 자격을 물었을 때 비로소 말문이 막히는 이유가 그와 같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가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방식이야말로 도덕이 아니라 비도덕의 극치는 아닌지 모르겠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도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인류를 도덕적으로 만든 모든 수단들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로 기억된다는 것, 그게 만약 우상화에 매몰된 한 인간이라면, 과오와 잘못이 거세된 채 섬뜩한 도덕 위에 서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차라리 기억되지 않는 한 인간이 되길 바라야겠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꽃이 되어야 한다면, ‘영원히’ 아름다운 꽃이 아니길 바라야겠다. 나는 차라리 바람을 노래하는 억새가 되고 싶다고 말해야겠다. 사람들이 그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고 말할지라도, 바람 불고 더럽고 척박한 땅에 비로소 뿌리내리는 하얀 억새꽃을 피우고 싶다고 말해야겠다.
멀티캠퍼스 SERICEO 전직지원사업 총괄
오민수
인스타그램 : 딴생각(oh_minsu)
기사 링크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5&aid=0003048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