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그리며
용준이 연아의 집 쪽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 부소대장이 용준의 어깨를 세게 잡아 앉히며 속삭인다.
“안된다 오상병, 지금 저쪽이 몇 명인 줄도 모르고 근처에 본대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뛰쳐나갔다가는 그냥 개죽음당하는 거다. 내가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절대 안 돼. 원통해도 일단 참아라. ”
휙 뒤를 돌아 부소대장을 바라보는 용준의 눈이 새빨갛다. 부소대장을 뿌리치며 뛰쳐나가려는데 부소대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잡은 양손에 힘을 주며 말한다.
“오상병, 제발 정신 차려라. 이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뛰쳐나갔다가는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 소대는 전멸이다. 그래도 꼭 나가야겠냐?”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어 감정을 추슬러본다. 몇 초가 흘렀을까, 용준이 심호흡을 하며 오른쪽을 바라보니 막내와 서준도 빨개진 눈으로 용준을 바라보고 있는데 주먹을 꽉 쥐었다. 용준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분명 그들도 용준과 같은 마음 이리라. 저 어린것이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하여 총에 맞아 세상을 뜬단 말인가? 보지 못했음에도 연아가 총을 맞아 쓰러지는 모습이 자꾸 생생하게 그려져 머리가 어지럽고 눈가가 아릿하다. 아무리 고개를 저어봐도 차오르는 분노에 이를 가득 깨무는 용준이었다. 저 치들은 아마 근처에 적의 소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전시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총을 쏴댄 것이 아니겠는가?? 저들은 이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저들의 세상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아무것도 상관없다. 이유를 불문하고 저치들을 다 쏴 죽이고 싶다는 마음밖에는 들지 않는다. 금수만도 못한 너희를 내가 어떻게 죽여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저 떠나버린 연아의 한스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까. 총으로 쏴 죽이 자니 총알이 아까워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 용준에게 부소대장이 말한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명령이다. 김경식 이병 너는 얼른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지금 상황을 알리고 모두와 함께 여기로 와라. 박 일병과 오 상병은 경계태세로 소대 전원이 이 곳에 도달할 때까지 대기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내가 비장한 표정으로 경례하며 사라진다. 서준은 화가 난 얼굴로 울고 있다. 총을 겨누고 있는 곳은 어깨인데 자꾸 가슴께가 아프다. 그런 서준을 바라보며 용준이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 소대가 오기만 하면 저것들을 다 인질로 잡아서 원하는 정보를 얻은 뒤 모두 죽일 거다. 연아한테 총을 쏜 놈은 손톱, 발톱까지 다 뽑아서 고통스럽게 죽일 테다.’
아마 사람을 죽일 때 죄책감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죽여 마땅한 이들을 죽이는데 죄책감 따위가 들 리가 없다. 인간성마저 상실하여 약자를 약탈하고 죽이는 것을 어떻게 사람으로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아닌 짐승 따위에게 인간의 대우를 해 줄 필요는 없다. 그냥 죽이면 된다. 그리고 이곳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터 아니던가?
용준이 감은 눈을 떴다. 무슨 꿈이 이렇게 생생 하단 말인가. 마치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렷하게 생각나는 꿈을 꿨다. 밖이 어둑한 것이 또 새벽녘이겠구나 하고 반대쪽으로 돌아 눕는데 오른쪽 간이침대에서 둘째 아들 대근이 자고 있다. 요 며칠 자식들이 돌아가며 병원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데 자기 때문에 다들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렇게 혼자 있을 수 있으니 잠은 집에 가서 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들, 며느리, 딸, 손자, 손녀들이 왔다 갔다 한다. 내가 병원에 있으므로 여러 식구들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자주 볼 수 없던 얼굴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