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그리며
"오상병 이제 그만 돌아가지, 저 애랑 제법 정이 담뿍 든 것 같던데, 나는 먼저 출발할 테니 인사 잘 나누고 오라고." 하며 부소대장이 뒤돌아 걸어가려는데 연아가 살금살금 다가와 말한다.
“아재요, 나는 아재가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 악을 뺵뺵 썼구먼. 이제는 나쁜 아재가 아닌 걸 알고 있소. 얼굴도 고운 양반이라 마음도 곱겠구먼. 그러니까 사람을 발로 뻥뻥 차고 그런 짓은 하지 마시오.”
부소대장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연아라고 했지? 어른들한테는 어른들의 세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내가 저 아재가 싫어서 뻥뻥 찬 것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라. 그리고 앞으로도 뻥뻥 안찰 테니 마음 놓아도 된다. 연아 너는 할매, 할배 잘 건사해 가 앞으로도 씩씩하게 잘 살아야 한다. 알겠지?"
연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소대장은 왔던 숲길로 들어갔다. 용준이 부소대장의 낯선 모습에 어리벙벙하게 서 있는데, 연아도 꼭 그런 눈치다.
"참말로, 왜 저 아재는 다정했다 심술 맞았다 한다요? 거 참 사람 헷갈리게 하는 사람이구먼, 아 참, 이제 아재도 가야 하오? 다른 아재들은 왜 안 온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내와 서준이 빈 어망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산중에 뭐 이리 큰집이 있어? 연아야 니 왕년에는 엄청 잘 나가겠구나 야. 이 정도면 어디 어디 김대감 댁 아씨 아니라니?"
연아가 아씨라는 말에 볼을 붉히며 답한다.
"에이, 아씨라니 내가 여인네긴 하여도 아씨까지는 아니라니까, 우리 할배가 아는 이가 많아서 장정 다섯 명이 몇 달을 붙어 집을 지어주었다 하오. 그래서 여태껏 비가 한번 새는 일이 없어."
연아가 말을 끝나기를 기다린 용준이 말한다.
"우리 연아는 아씨만큼 예쁘니까 아씨 해도 된다. 이제 아재들은 가야 하니까 저 어망으로 물고기도 잡아먹고 하면서 잘 살아야 한다. 오다 보니 깊은 숲이라 나무에 열매들도 제법 있던데, 껍질을 까서 속살에 혀나 팔뚝에 비벼보고 이상이 없으면 그런 열매는 먹어도 된다. 그리고 아재가 말했듯이 절대 다른 군인들 앞에는 모습을 나타내면 안 된다. 알았지? "
연아는 얼굴이 붉었다가 파랬다가 하얘졌다가 한다.
"알겠소, 안 가면 안 되는 거제? 아이 참, 내 정신 좀 봐! 이미 고것은 많이도 물어봤는데 이렇게 또 묻고 있구먼 " 연아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막내가 입술을 꾹 누르며 말한다.
"연아야, 혹시 이 오라비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시간이 되면 꼭 너희 집에 들렀다가 갈 테니 잘 살고 있어라. 다음에 올 때는 물고기 말고 토끼 고기도 잡아줄게."
연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왕방울만 한 눈물이 바닥에 툭툭 떨어진다. 세 사람도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다.
서준도 인사한다.
"우리 예쁜 연아, 잘 있거라. 잘 살아야 한다"
소리도 못 내고 숨죽여 울면서도 연아는 손을 흔들며 말한다.
"오라비, 아재들 너무 고마웠소. 나는 그간 이틀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것도 같아. 아재들도 건강히 잘 다녀오시오.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꼭 여기 들려서 연아 보고 가야혀오?!!"
이미 연아 집에서 멀어진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연아를 향해 손을 흔든다. 세 사람이 숲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자 연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잠시였지만 오라비가 생긴 것 같고, 삼촌이 생긴 것 같고, 나에게는 없다는 아비가 생긴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그들이 고맙고도 야속하다. 그저 텅 빈 마음으로 숲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부스럭 소리가 들린다. 아재들이 다시 왔나 싶은 연아가 숲 쪽으로 다가서는데 뾰족한 장대 같은 것이 연아 쪽을 향한다.
어어 이게 뭐지 ‘아, 그때 그 아재들이 고기 잡을 때 쓰던 작대기인가?’ 생각하는데 갑자기 옅은 웃음소리가 들리며 '탕' 귀가 먹을 듯한 큰 소리가 난다. 갑자기 가슴께가 뚫린 듯이 아프다. 정신이 아득하고 하늘이 노랗다. 가슴께부터 치마 밑단까지 차갑고 축축한 느낌이 든다.
돌아가는 길 막내와 서준은 눈물 콧물 범벅이다. 연신 팔뚝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안됐다. 용준도 자꾸 솟아나는 눈물을 참을 길이 없어 손 끝으로 눈물을 훔쳐낸다. 벌써부터 ‘아재요 아재’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고기를 잡았던 개울가에 다다르니 부소대장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
"그래, 다들 인사는 잘하고 왔냐? 내 이번에는 따로 보고를 안 할 것이지만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경우에는 자비란 없다. 알겠나?"
고마운 마음으로 우렁차게 대답을 하려는 순간, “탕” 외마디 총성이 울린다. 다들 총을 고쳐 잡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소리가 난 곳은 연아네 집 쪽이다. 막내가 총을 어깨에 걸더니 미친 듯이 연아네 집 쪽으로 뛰어간다.
부 소대장이 "아니 저 미친 새끼가"라고 외치며 막내를 잡기 위해 따라 뛴다.
나머지 두 사람도 뛰기 시작한다. 막내를 업어치기 해서 옆에 앉혀놓은 부 소대장이 대기하라는 수신호를 보낸다.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란스러운 것으로 보아 꽤 여러 명이 있을 것이다.
‘연아는 무사할까? 무사하겠지? 무장도 안 한 어린애를 쏠 이유가 없지. 암만암만.’
네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이다. 힘없는 이들이 사는 집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위협이 될 리 만무하다.
‘굳이 누군가가 이들을 죽일 이유는 없었겠지. 그럼 아까 그 총소리는 뭐였지?’
수풀 사이로 연아네 집 쪽을 쳐다보는데 땅에 뭔가가 있다. 조금 전 연아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그 자리 주변이 온통 빨갛다.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다. 호흡이 가빠지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인민군이라지만 저런 어린애한테까지 총을 겨눈다 말인가? 방금 전까지도 헤어짐이 아쉬워 서럽게 울고만 있던 어린애가 왜 저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왕방울만 한눈에 웃으면 초승달처럼 눈이 곱게 휘어지는 아이였다. 죽고 죽이는 전쟁 아닌 전쟁통에 메말랐던 마음을 달래주고 얼래 주고 환하게 다시 밝혀준 고마운 아이였다. 그 아이는 물고기를 잡아주는 우리가 고맙다 했지만, 누군가를 죽여야만 내가 죽지 않는 삶을 살고 있던 우리들은 그 아이 덕에 잠시 멈춰 서서 다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 단전 아래 깊숙한 곳부터 욕지기와 분노가 치밀어온다. 세 사람의 눈에 핏발이 서며 총을 쥔 손에 핏줄들이 불거져 나온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다.
'저 새끼들을 죽여야겠다. 다 죽여서 씨를 말려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