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무언가 계속하고 있다.
유난히 지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런 날들은 대부분 해야 하는 일이 많은 날이기도 하다. 정리해야 할 것도, 움직여야 할 일도, 생각해야 할 일까지 모든 것이 많은 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직감적으로 내가 번아웃 그 언저리 어디쯤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드는 날이다. 이럴 때는 무조건 쉬어줘야 하는데 할 일이 있으니 맘 편히 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들의 진도를 뺄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짜증지수만 올라간다.
아,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나?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손가락도 까딱하기 싫고, 입도 벙긋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당연히 안부를 물어오는 연락조차 반갑지 않은 날인데, 기가 막히게도 이런 날은 평소 연락을 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도 연락이 온다. 그냥 날 좀 내버려 두면 안 되나? 그나마 없던 에너지가 더 소진돼버린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갔을 일들에도 화가 나거나, 충분히 이해했을 일들에도 삐딱선을 타게 된다. 내가 원치 않음에도 나에게 관여하는 행위, 나의 에너지를 빼앗기는 조그마한 행동에도 쉽게 화가 난다.
나 같은 경우는 신경 쓰는 일들이 많아지고 피로가 누적되면 몸에 탈이 나고는 하는데, 나의 위가 활동을 멈추며 가장 먼저 신호를 준다. 위가 일을 하지 않으면서 두통이 시작된다. 이제는 거의 같은 패턴이라 '아, 너희 또 왔니?' 하며 숨을 고른다. 얘들이 오고 나면 환장 삼박자가 시작되고 며칠간 지속된다. 밥을 먹지 못하니 가뜩이나 좋지 않은 컨디션이 더 나빠지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그나마 있던 입맛마저 사라진다. 두통이 시작되면 특히나 밤에 심해지기 때문에 숙면을 취할 수 없다. 수면의 질이 나빠지니 오전과 오후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의 이런 증상은 몸의 병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병이라 내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며칠을 고생해야만 몸이 다시 회복된다. 대부분의 경우,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시간이 필요하지만 대략적으로 일주일 내로 상태가 점점 좋아진다.
작년 12월부터 2월 마지막 주인 오늘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개월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나에게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90여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작년 12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올해 1월에는 조카가 수술을 했다. 2월에는 엄마의 환갑과 조카의 돌잔치가 있었다. 개인적인 일도 있었지만 주로 가족과 관련된 일들이 많았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쭉 이어지는 통에 정신을 차려보니 오늘, 2월 말이다. 어떤 일은 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어떤 일은 기한이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공통점이라면 알아보고 준비하고 결정해서 진행해야 하는 일들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들도 어떻게 할 지에 대해 모두 정리하여 결정했다. 이제는 정리하고 계획한 대로 해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여태껏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써왔던 모양인지 기어코 내가 고장이 났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보다는 '할 수 없었다'는 말에 더 가깝다. 밥도 먹고 싶지 않았고, 책도 읽고 싶지 않았고, 글도 쓰고 싶지 않았고, 움직이고 싶지 않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자!'라고 굳세게 마음먹었지만 빨래를 두 번이나 돌리고, 끼니도 두 번이나 챙겨 먹었다. 심지어 늦은 저녁, 나는 꾸역꾸역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앉아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나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내일은 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으려나?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맘편히 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다 내려놓고 온전하게 쉴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나와 비슷한 당신이, 딱 오늘의 나와 같은 날, 이 글을 봤을 때, 아차차 하며 내 몫까지 쉬어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