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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빛 Nov 22. 2021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MBTI 의 토닥토닥

'하아~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냥 하나만 결정해.'


A, B와 달리 나를 잘 지켜보며 잠자코 있던 C마저 더 이상은 지친다는 듯이 말을 던졌다.

 

A, B, C는 모두 내 안에 살고 있다.

내 머리에 있는 A는 '이러이러한 원칙이 있으니 그냥 원칙대로 깔끔하게 하면 될 일'이라 한다.

내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B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무정할 수 있냐, 인간 살이에서 뭣이 중허냐' 한다.

불행히도... 나는 A와 B의 의견에 정확히 100%씩 동의한다.


학생이 선생님께 불손한 태도를 보여 벌점을 받게 되었고, 이전에 이미 모아둔 벌점이 많아서 퇴학 처분을 내려야 하는 사안. 이를 대하는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뱃속에서 튀어나오는 C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다. 예전에 있던 사례도 살펴보고, 당사자 이야기도 들어보고, 목격자 이야기도 들어보고, 왜 그런 표현을 했는지 가정, 학교, 사회, 국가 차원에서 논의해보고 싶은 욕망이 가시지 않는다. B랑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걔 마음이 어땠겠어, 그 선생님은 어땠겠어. 아 마음 아파. 어떡해, 어떡해, 으헝헝'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른다. 결정할 시간은 다가온다. 결국에는 A가 나서서 뒤처리하게 할 거면서 꼭 마지막까지 지지고 볶는다.





나는 또 수업을 준비할 때 교과서가 아닌 개론서부터 뒤적인다. 고등학교 교과서 단 두 쪽을 준비하는 것에도 배경이 되는 이론과 과정을 모아 하나로 꿰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마음 편하게 두 쪽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나'이기에 매번 수업 준비에 드는 에너지가 엄청나다.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한다. 그냥 교과서 학습활동의 문제와 답만 스스로 풀어봐도 가르칠 수 있는데 혼자 그 심연을 파고들으려 한다. 그러다 정작 아이들에게 전달할 핵심은 정리하지 못한다고 A에게 핀잔을 듣는다. 커다란 바다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다 수업은 코앞에 닥치니, 결국 내가 피하고 싶던 '깊이 없는 수업'을 하는 거 아니냐는 A의 면박에도 할 말이 없다. 그러게 말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아니, 누가 시키면 못할 짓인데, 간단한 개념에도 온갖 이론과 연구 내용에 맥락까지 궁금하다. 왠지 뒤에 숨어있는 심오한 진리를 내가 놓치는 게 아닐까 매 순간 멈추게 된다.


그런데 사사건건 모든 것들을 파헤치고 다니자니...

B: 너무 신난다, 그치?  

A: 아 머리 아파. 소는 누가 키워, 소는~?






정확히 할 말만 하는 상사가 부러웠다. 멋지고 명쾌했다. 그 앞에서는 저절로 작아진다.

"제가요.... 구구절절 이래서 금요일에 시간표를 바꿔야 하고요, 아이가 이렇고 남편이 저렇고 저는 어쩌고 저쩌고요 얼씨구절씨구 해서요 차차차 하는데요..."

설명하고 있으면,

"아 바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뭐 어떻게 하겠다고? 결론이 뭐야?"

당장 한 마디로 요약하게 한다. 민망하다. 그 순간 나는 '시간 낭비'가 사람의 모습이면 나처럼 생겼겠지 한다. A가 빨개진 내 귀에 대고 '모질이'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나마 B가 '부장님 너무해. 나한테는 중요하니까 말했는데." 하며 나를 위로하지만 '너나 나나... 누가 누굴 위로할 처지냐...' 한다.






하루는 이런 내가 몹시도 싫어서 멍하니 천장을 보고 대 자로 뻗어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나에게 누가 톡을 보냈는가 전화기를 열어 보니 광고였다. 나에게 mbti 검사를 하란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의 유형을. INFJ. 알고 있었지만 우습게 생각하고 넘겼다. 사람을 유형으로 재단할 수 있겠어? 어불성설이지... 혈액형이랑 뭐가 달라?'

나는 입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왜인지 엄지 손가락으로 광고를 클릭하고 있었다.


'선의의 옹호자'

그래 선의의 옹호자였어. 무얼 옹호하는 거지. 나는 뭐든 맞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뭐든 옹호하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극공감과 과공감형. 세상 사람들이 겪는 문제들이 너무 잘 느껴진다. 아끼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실제보다 훨씬 심각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이들 안에는 깊이 내재한 이상향이나 도덕적 관념이 자리하고 있는데, 다른 외교형 사람과 다른 점은 이들은 단호함과 결단력이 있다는 것이다. 바라는 이상향을 꿈꾸는데 절대 게으름 피우는 법이 없으며, 목적을 달성하고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이행해 나간다.'


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그래, 나 그런 거야? 나는 그랬던 것이야. 나는 이상적 관념도 있고 단호한 결단력도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만날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아팠던 거야?"


왜인지 갑자기 눈물이 주룩 흘렀다.

마치, 토끼를 따라가려는 거북이에게 '거북아, 너는 원래 거북이라서 힘든 게 맞아. 너는 아주 정상이야.'라고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나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하면서 나를 그대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마음으로 생각 많은 내가 나에게 주는 피곤함을 많이도 미워했었나 보다. 분주한 머릿속을 찌질이라 생각하기도 했던 거 같다. 그런데 갑자기 MBTI유형 설명이 나를 토닥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 나는 이래. 나는 원래 이래. 괜찮아, 다 괜찮아.' 하면서 감사함이 올라왔다.


맞아.

내가 긴 호흡의 어느 만큼 와 있는지 나는 그것을 이해해야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야.

여기가 어디인지 당장 눈앞의 것만 처리하라 하는 것은 나에게 고문과 다를 바 없어.


나는 인간을 유형화하고 심리테스트를 한 뒤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들을 우러러보기로 했다.

그것은 '괜찮니?' 물어봐주는 따뜻한 위로이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 하면서 손 내미는 공감이다.

"심리테스트 같은 거 왜 해? 다 자기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되어 있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래, 나의 이야기 같으면 지금 내가 그런 상황인 거고, 그런 나를 한번 돌아봐 줄 거야."



A는 B에게 자꾸 열등하다고 말한다. 나는 B가 그것을 다 알면서도 A의 깝침과 설침을 받아주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A는 A대로, B는 B대로 다 잘난 맛에 사는 거지.

B도 A가 답답해!

그치만 그런 답답한 A마저도 이해가 되어 버리는

나의 이 공감력 때문에 봐주고 있다는 것을

A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할 걸?!



         가만있어보자. 내일 수업은..... 뒤적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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