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예찬은 목이 아픈 것이다.
남편이 자신이 내게 깜짝 프러포즈했던 날을 이야기하며 왜 눈물이 나지 않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십여 년도 더 지났는데 볼멘소리를 하면서. 그날 느꼈을 남편의 서운함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애도한다.
나는 눈물이 헤프다. 너무 기뻐서도, 감동받아서도, 슬퍼서도, 불쌍해서도...
감정을 건드리는 아주 작은 터치에도 어떤 느낌이 밀물처럼 몰려와서 나를 완전히 휩싸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고 나면 눈물방울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유낙하.
어릴 적부터 친구들도 자주 놀렸다. 영화를 보다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오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내 눈부터 살폈다.
"또 운다. 운다."
영화 보러 가기 전부터 자기들끼리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이 영화 보다가 얘 분명히 운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포함하여 친척 어른들도 하나같이 그러셨다.
"쟤는 저렇게 잘 울어. 에이 울보."
그러면서 드라마 속 저 사람 진짜 죽은 거 아니라고 친절히 알려주기도 했다.
요즘에는 조금만 조용히 있으면 큰아들 준이가
"엄마, 눈물이 나올 거 같아?"
하고 묻는다. 최근에는 아이들에게 '할미꽃' 읽어주다가 결국 끝까지 못 읽고 준이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왠지 준이도 내 피가 흐르는 거 같다.... )
잘 운다고 울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우는 게 싫었다.
일단은 안 우는 사람보다 더럽다. 옷소매만으로는 부족해서 나중에는 옷을 뒤집어 까서 콧물을 닦고 있다.(배꼽이 보여도 어쩔 수 없어 흑흑) 가끔은 침도 흘린다.
안 우는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느꼈다. 어쩐지 판단력도 떨어지고 덜 이성적이며 맺고 끊는 거 잘 못하는 지질한 사람으로 보일 거라 생각했다. 눈물 몇 방울이라면 톡톡 닦고 우아하게 나올 텐데 영화가 끝나도 여운이 가시지를 않아 뒤끝 있게 '3단 숨 들이마시기'같은 것도 한다.
또 아프다. 오열을 참으려 하면 목구멍도 진짜 아프다. 많이 울게 되면 눈도 따갑다. 머리도 멍하다.
게다가 내 눈물과 울음소리에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중요한 장면을 놓치기도 하고 이야기를 못 듣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떠나서도 우는 모습은 못생겨져서가 아니라 그냥...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싶은 내 모습은 아니다. 좀 내 감정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에서 운다면 더 좋겠다. 안전한 공간에서 안전한 사람 앞에서 울고 싶은 마음이랄까?
공연을 좋아하는 나는 남편(당시 남자 친구! 꺄~)이 연극 보러 가자 하니 신났다. 공연 시간을 잘못 알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남편과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연극은 시작된 뒤였다. 왜인지 다행히 맨 앞자리에 자리 두 개가 남아 있어서(엥?) 우리는 그 자리에 앉았고 바로 연극을 재미나게 감상했다. 내용은 여사친 남사친이 갑자기 눈이 맞게 되어 결혼하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극이 끝날 무렵 남편은 내게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나는 속으로 '나 안 기다리게 하려고 지금 가나? 곧 끝나는데 연극 끝나고 가도 될 텐데'했다. 배우들이 자기 역할을 소개하며 인사를 마치고 엔딩 음악의 전주가 흘렀다.
드그드그드그드그드그드그드그드그
그리고 들리는 것은
"지히이히이이치이이인 하아루가아 가아고오오오오오 (덜덜)"
하는 염소 목소리, 아니 남편 목소리
성시경의 '두 사람'을 부르며 무대 구석에서 남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노래를 마친 남편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나에게 무대로 나오라 손짓했다.
나는 슬리퍼라고 하기도 민망한 쓰레빠를 신고 있었고 머리도 안 감고 나온 상황이었다. 옷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런 쓰레빠에 옷차림을 신경 썼을 리 만무하지. 아무튼 나는 화알짝 웃으며 나갔다.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앞에 서있는 시간이 예상보다 아주 길어졌다. 편지를 빽빽하게 두 장을 써온 이 남자. 둘이 마주 보고 서있고 남편은 편지에 시선을 꽂은 채 그걸 끝까지 읽는데 관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하나도 안 들려서 멍하니 남편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던 듯하다. 아마 주최측에서는 한두 줄짜리 카드를 준비하라 했을 거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은 남편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나에게
"나랑 결혼해 줄래?"
해서 내가
"당연하지!"(드디어 편지 끝난 거야?)
했다는 것이다. 신나게 웃으면서!
음..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나는 사실 조용한 이벤트를 꿈꿨던 거 같다.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긴 시간 동안 사람들 앞에서 서 있는 것도 의미 없이 느껴졌다. 정직 중요할 편지 내용이 전혀 들리지 않았고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때의 내가 이해된다.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라 느꼈고 나는 그냥 우리 둘이 작고 조용하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다.
그러니 여보 봐주라! 아쉬우면 함 더 고고! ㅋㅋ
비폭력대화 관련하여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교사 연수가 있다. 그때 강사님께서 욕구 목록을 주시며 나에게 정말 소중한 욕구를 찾아보라 하셨다. 쭉 읽어 내려가다가 이거다 싶은 게 있었다.
인생 예찬(축하, 애도)
위에 보이듯 인생 예찬 옆에는 괄호 열고 '축하, 애도'라고 되어 있다. 나는 그때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욕구는 '인생 예찬'이에요. 너무 감격스러울 거 같아요, 인생을 예찬하는 삶이! 그렇게 살고 싶어요"
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치면서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에는 이런 생각을 나누었다.
"저는 평소에 잘 웃고 잘 우는 사람인데, 그런 제가 이해됐어요. 내가 내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았던 거구나 싶은 마음이요. 삶을 살면서 감정 파동이 잔잔할 수도 있는데 저는 엄청난 굴곡의 감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았던 거 같아요. 그게 제 인생에 대해 진짜 축하와 진짜 애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면서 자주 눈물 흘리는 내가 너무 좋아졌다. 정말 인생을 즐기고 있구나 하면서.
놀이기구를 타고
"흠..." 하다 "아이 시시해"하고 내리는 사람과
"오예~ 우후 이힉 크헉.." 하다 내리는 사람 중 누가 뽕(!)을 뽑은 것일까? 이미 탔으니....?!
나는 인생도 만끽할 마음을 가지고 조금 오버러스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떤 느낌과 마주한다. 잔잔하든 강하든. 그 느낌은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었는지 여부를 알려준다.
남편이 내가 울지 않았을 때 서운함을 표현했다.
남편의 서운함은 어떤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자신이 애써 준비한 것에 대한 인정?
나의 감사로 서로 연결되는 것?
감동이 통할 수 있다는 연결감?
함께 축하할 수 있다는 일치감?
이런 것들일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별표 다섯 개)
느낌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진짜 욕구를 만나게 된다.
내 눈물이 싫어서 삶의 어느 때는 실제로 딱딱해졌던 거 같기도 하다.
뭘 그런 거 갖고
안 웃겨
시시해..
그런데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감사한 것에 엄청 감사하고 슬픈 것에 엄청 슬퍼하고 그러고 싶었을 거다.
나는 나에게 속으로 이야기해보았다.
"네가 중요시하는 욕구가 네 인생 전체에 있기를 바라. 내가 도울게."
지금 갑자기 목이 너무 아프네
인생 예찬이라는 것은 목이 아픈 것이다.
<지지 않는다는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