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일정표
이번 주부터 방학이다. 방학.
방학이 다가올 때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는 출근하느라 미루고 미루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차곡차곡 일정표에 쌓는 것이다.
거기에 배우고 싶던 각종 연수와 강의 목록을 끼워 넣은 뒤 읽고 싶던 책까지 빈틈에 꽉꽉 채우면 방학 기간 테트리스 완성!
물샐틈없이 촘촘하다. 욕망의 용암이 끓는다.
내 고통의 비명은 대부분
'하아, 이것도 하고 싶은데...'
그렇다면 내 모든 고통은 욕망에서 왔을까?
하고 싶은 게 너어어어무 많다.
그 와중에
못 만나던 사람들은 또 만나고 싶고
아이들과 시간도 잔뜩 확보하고 싶은데
방학 계획표는 인정사정 하나 없다.
그러니 내가 상상한 여유는 결코 오지 못한다.
오히려 방학 기간에 과로사할 기세다.
세워둔 수많은 계획에 허우적거리다 밤늦게 잠들고
아침에는 할 일에 이끌려 기상 시간을 앞당긴다.
이 일 하고 있으면 저 일이 생각나니
일을 하나 끝마쳐도 마음이 바쁘다. 개운치 않다.
책은 또 얼마나 많이 쌓아두었는지
누군가 추천한 책은 중고로 사고
내가 간직하고 싶은 책은 새로 주문하고
학교도서관에서 빌리고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빌리고
학교 근처 도서관에서 빌리고
남편 계정의 이북과 전자도서관도 기웃거린다.
그러고는 이책저책 야금야금밖에 못 본다.
가끔 궁합이 맞으면 단숨에 읽기도 하지만
아직 펼쳐보지도 못한 책이 태반이다.
제목만 계속 읽으면서 왠지 다 읽은 거 같은 친근감마저 느낀다.
하루 할 일 목록이 'A4 한 장 가득', 책상 위에 쌓여가는 책을 보니 겹치는 장면이 있다.
쇼핑 중독인의 모습을 다룬 TV 프로그램이었는데, 뜯지도 않은 택배 상자가 가득 쌓여있는 방안. 자기를 둘러싼 상자들 틈에서 또 구매 버튼을 누르고 있던 한 여인.
책 틈에서 또 책을 검색하는 나, 그 여인
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나의 욕구에 집중해 본다.
발전을 향한 수고가 혹시 두려움이나 수치심에서 출발한 것일까? 지금보다 좀 괜찮은, 더 나은, 많이 아는.... 이도 저도 아니면 '혹시 모르니 나중에라도 쓸모 있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은 바람일까?
그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기여에 대한 소망인지 살펴보고 그게 아니라면 한 템포 쉬어가야겠다.
어떻게?
내가 지금 이루려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지, 그래서 충족되는 욕구가 무엇일지 가만히 들여다보는 거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찬찬히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없었던 거 같다.
Doing이 아니라 Being
존재 그 자체로도 충분한 것.
이번 방학 진짜 알차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동동거리고 숨 차 하는 나 좀 만나러 가자.
이것도 일정표에 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