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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빛 Sep 26. 2023

내가 준이를 낳지 않았다면...

유미의 마이크 3

3

비가 내리고 있었어. 유미가 ‘육아’를 사유로 15년 다니던 회사에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된 날이기도 했지. 전날 저녁 집 좀 정리하라는 남편과 다투고 밤잠을 설친 날이기도 했고.

아까부터 나가자고 조르던 준이는 비가 와서 안 된다고만 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어. 그러다 기막힌 생각을 했어. 집안에 비가 내리게 하면 되겠다고. 준이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어. 샤워기 물을 틀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유미를 향해 물줄기를 쏘았어. 천장과 바닥으로 샤워기를 흔들면서 소방관 아저씨가 된 기분에 준이는 무척 신이 났지.

“엄마! 비가 온다, 죽죽! 비가 온다, 죽죽! 엄마, 엄...”

깔깔 웃던 준이는 유미를 부르다 표정이 굳었어. 유미의 화난 얼굴을 보았거든.

“이게 무슨 짓이야?”

물에 빠진 듯한 유미는 준이에게 달려가 샤워기를 낚아채며 말했어. 그러나 유미의 손에서 샤워기가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지. 준이보다 신나 보이는 샤워기는 춤을 추며 부엌과 거실에 물을 뿜어댔어. 샤워기를 끄겠다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유미는 허둥지둥 슬리퍼를 신다가 벌러덩 미끄러지고 말았어. 아픈 엉덩이는 둘째치고 뒤처리가 걱정이었어. 유미의 어깨가 축 늘어졌어. 일어나 거울을 보니 물에 빠진 생쥐 몰골에 완전히 지친 얼굴이었지.

‘내가 준이를 낳지 않았다면... 지금쯤 회사에서 커피 한 잔 내리고 있을까? 

유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어. 

“후, 내 자리에는 누가 왔을까?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

유미는 고개를 저었어.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준이에게 많이 미안했어. 하지만 미안함은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사라졌어. 물난리. 오전에 들은 남편의 말이 떠올랐어.

‘오전에 집 정리 다 했어, 분명히! 준이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누가 정리를 안 한다고! 이것 봐. 해도 그때뿐이잖아!’

닦을 새도 없이 눈물이 뚝 떨어졌어. 유미는 급히 화장실에서 나왔어. 준이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어. 유미는 준이를 지나쳐 안방 화장대 서랍에서 마이크를 꺼냈어. 전원 버튼에 막 손을 올리려는데 바로 유미의 몸이 답답해졌어. 순식간에 풍선에 바람 빠지듯이 쑤욱 줄어든 유미는 준이 또래의 아이로 변해 있었지. 유미는 재빨리 마이크의 전원을 켰어. 

‘탁’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어.

“3:00”

“2:59”

“2:58”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어.

‘진짜인가 보다.’

바깥을 보니 놀랍게도 비마저 멈춰 있었어. 마치 대각선 모양을 한 바늘이 하늘에 떠있는 듯 보였어. 그런데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 잊고 있던 어릴 적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야.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유미가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처럼. 유미에게는 지금 눈앞에서 또렷하게 일어나는 현실처럼 느껴졌지.

어린 유미가 엄마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온 날이었어.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 마루는 물이 유미의 무릎까지 차오르고 있었어. 유미의 엄마는 발밑을 내려다보며 놀라 비명을 한번 지르고는 여기저기 전화를 한 뒤 쓰레받기로 열심히 물을 퍼냈어. 그때 유미는 엄마 옆에서 수영을 시작했어.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신나게 물놀이를 즐겼지. 

유미는 그때를 떠올리자 신이 났어. 바깥의 비도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미는 신발장에서 장화를 꺼낼까 생각했어. 그러나 아이가 되어서 보니 위쪽 선반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어.

‘아! 내가 아이가 되어 있었지!’

유미는 문득 마이크를 보았어.

“0:58”

“0:57”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3분은 생각보다 짧았어. 유미는 얼른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했어.

“준아, 엄마랑 비 맞으러 나가고 싶었어? 우리 함께 나가볼까?”

그러자 줄어들던 마이크의 숫자가 뚝 멈추더니 전원이 꺼졌어. 유미의 몸은 쭈욱 늘어나면서 다시 어른의 몸으로 돌아왔지. 유미가 안방 문을 열자마자 안방 문 앞에 서 있는 준이와 마주쳤어. 화장실에서부터 안방까지 유미를 쫓아온 모양이었어. 준이는 엄마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렸어.

“엄마, 진짜야?”

준이는 환하게 웃으며 물었어.

‘마이크에 한 이야기를 들은 건가?’

“응. 여기 바닥만 얼른 닦고 나가자!”

“야호!”

준이는 유미를 꼭 안았어. 유미는 마무리 못한 설거지를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어릴 적 마루에서 했던 물놀이의 즐거움이 남아있었어. 품에 폭 안긴 준이가 따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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