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으로 지구 한 바퀴] 중동의 보석 요르단 여행 '와디무지브'
거울 앞에서 물었다. "너, 지금 행복하니?" 이 질문의 답은 '사표'였다. 배낭을 멨고, 지구를 한 바퀴 돌겠다며 길을 나섰다. 좌충우돌 세계일주 여행기를 연재한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이란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이란을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란 최고봉 다마반드 산(5670m)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다 이란에서 육로로 터키 국경을 넘으면 노아의 방주가 숨겨져 있다는 아라랏 산(5137m)이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아랍에미리트에서도 이란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무척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또 이란으로 들어가는 항공료가 만만치 않았다. 대신 아랍에미리트에서 이란으로 입국할 경우 바닷길을 이용해 이란 남부부터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도 썩 내키지 않는 루트였다. 다마반드 산은 이란 북부에 위치한 테헤란에서 가까웠다.
이란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러던 중 요르단으로 가는 최저가 비행기 표가 눈에 들어왔다. 요르단은 도착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다 유적지 중 유일하게 내 구미를 당기는 '페트라'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란을 포기한 이유는 세 가지 의문을 떨쳐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현재 능력으로 5670m의 고산을 혼자서 등정할 수 있나?
두 번째, 여행 초반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고산등정에 도전할 필요가 있나?
세 번째, 이란을 방문하면서 다마반드 산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할지 모른다.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난 요르단이란 난이도 하의 여행지를 선택했다. 여행정보를 많이 모아놓았던 이란과 터키에 비해 요르단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엄청난 여행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두바이에서 요르단 암만으로 떠나는 날 내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게 몸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설사도 다시 시작됐다. 명치를 지그시 눌러보니 뭔가 딱딱한 게 느껴졌다.
왠지 두바이가 나랑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갖고 있던 수지침으로 열 손가락을 다 따봤지만 그때 뿐이었다. 설사약도 다 떨어졌고, 체할 때 먹는 약은 가진 게 없었다. 두바이~암만 이동은 '플라이 두바이'를 이용했다. 카라치~두바이 구간에서도 이 항공사 비행기를 탔었다. 친절함을 기대하긴 무리였다. 저가항공은 불친절해야 한다는 사내방침을 세워 놓은 것처럼 승무원의 표정은 하나같이 우울했고 일 처리는 기계적이었다.
보딩이 시작됐다. 비행기에 오르니 예약한 창가 자리에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남자의 자리는 반대편 중간 자리였다. 중간에 끼는 게 싫어 내 자리에 앉겠다며 의사 표시를 확실히 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자리를 바꿔주고 말았겠지만 그럴 심신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내게 이 남자는 뻔뻔하게 자기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속병으로 몸은 쇠약해져 있었고 신경은 날카로웠다. 또박또박 다시 한 번 말했다.
"비켜!"
그 사이 승무원이 날 보며 말했다.
"아 유 오케이?"
'뭔! 오케이! 이거 네 일이거든~'이라고 한마디하고 싶었지만 만사가 귀찮아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로 상황을 종료했다. 중국의 미니버스 안내양보다도 못한 서비스였다. 3시간 뒤 비행기는 요르단 암만 국제공항에 안착했다. 요르단은 공항에서 도착 비자를 손쉽게 받을 수 있는 나라다. 비자 비용은 20디나르(10디나르는 우리 돈 1만 6000원 정도)였고 한 달짜리 비자를 준다.
공항은 우리나라 지방공항을 연상케 하는 아담한 크기였다. 여기서 암만 다운타운까지 택시를 타면 20~30디나르 사이에서 흥정이 된다. 암만에 도착하니 속이 좀 편해진 것 같아 원래 계획대로 도심까지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 요금은 3디나르. 공항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택시를 타면 멀지 않은 곳이 암만 다운타운이다.
버스 안에서 몇 명의 현지인이 내 국적과 목적지를 물어주었다. 짧은 영어로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도 설명해주었다. 물론 파키스탄 정도의 친절은 아니었지만 감사하고 고마웠다.
버스 종점은 택시기사들로 우글거렸다. 다운타운까지 최초 흥정가는 5디나르였다. 콧방귀를 한 번 뀌니 가격은 4디나르로 깎였다.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은 가격이었다.
다른 기사를 찾아 나섰다. 3디나르까지 가격이 내려갔다. 길가에 나가 다른 택시를 잡겠다고 했더니 여긴 택시가 잘 다니지 않는 곳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요르단부터는 거짓말이 난무한다. 절대 택시기사의 말을 믿으면 안 되는 동네다. 잠시 뒤 미터로 간다는 기사가 나타났다. 다운타운까지 2.5디나르가 나왔다. 800원 아끼려고 그 신경전을 한 거였다.
'된장.'
다운타운에 내려 어렵지 않게 클리프호텔을 찾았다. 한국 여행자들이 많이 간다는 숙소였다. 싱글룸이 9디나르였고 아침 식사는 없었다. 방에 들어가니 바로 직전 이 방을 썼던 숙박객의 체취가 향긋(?)하게 남아 있었다. 전형적인 암내였다. 벌써 오후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다른 숙소를 찾을 시간도 아니었고 기력도 없었다.
숙소를 잡고 나니 잠잠하던 배가 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장 약이 필요했다. 숙소 주인은 24시간 문을 여는 약국이 근처에 있다고 했다. 약국으로 가기 전 증상을 설명할 수 있게 영어사전을 뒤적거려 적당한 단어를 찾아놓았다.
약국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약사는 언어장애가 있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편이었는데, 영어로 인사하는 걸 봐서는 말이 통할 것 같았다.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영어 문장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불행하게도 약사는 체했다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연기력을 발휘해야 했다. 명치끝을 누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약사는 그제야 얼굴이 밝아지며 약을 꺼내왔다.
그런데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설사란 단어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표현한다는 말인가. 팬터마임의 최고봉이 와도 설사를 표현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리액션이 중요했다. 중국어 한마디 못해도 한 달 넘게 중국을 돌아다녔다. 여기서 기죽을 내가 아니다. 일단 초딩 수준의 영어단어는 알고 있는 약사였다. 그렇다면 설사를 연상할 수 있는 과한 액션으로 그의 이해를 도와야 한다. 쉽게 가야 한다. 일단 설사는 쉽게 '물똥'이다. 거기다 '스토마크 에이크'란 표현을 덧붙이면 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말문이 쉽게 열렸다.
"워터 쉣트. 스토마크 에이크!(물 똥? 복통!)"
현란한 내 오른손은 엉덩이 뒤쪽에서 물똥이라는 표현을 도왔고, 다시 아랫배를 잡으며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편의 팬터마임을 관람한 약사는 쇳덩어리가 금덩어리로 바뀐 것처럼 기뻐했다. 내 증상을 알아차려서 좋은 건지 내 행동이 재미난 건지 분간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인자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약사는 내게 꼼꼼하게 복용법을 두 번이나 설명해주었다. 난 암만의 으슥한 밤거리에서 내 연기에 심취한 채 빵 터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녕,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구나."
여행 정보
암만에 갔다면 하심 레스토랑에 꼭 가봐야 한다. 이곳에서는 병아리 콩 또는 잠두로 만드는 중동의 크로켓 '팔라펠'을 맛봐야 한다. 또 '호무스'도 우리 입맛에 잘 맞다. 병아리 콩을 갈아서 참깨소스·올리브오일·레몬즙·소금·마늘을 넣고 만든 호무스에 빵을 찍어 먹으면 그 고소함이 오랫동안 입안을 즐겁게 한다. 호무스는 거의 모든 중동 사람들이 먹는 기본 요리 중 하나다.
약을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보니 해먹이 따로 없었다. 침대 한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덕분에 자연스럽게 인체공학적(?) 자세로 잠을 청해야 했다. 해먹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곤욕이었지만 다운타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소음도 문제였다.
웬만하면 처음 잡은 숙소를 잘 옮기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본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만수르호텔로 향했다. 이 숙소는 암만 다운타운에서 가격·시설로 클리프호텔과 쌍벽을 이루는 곳이다.
그나마 만수르호텔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던 건 소음이 덜한 것 뿐이었다. 일명 '걸레빵'이 아침으로 제공되는 것도 클리프호텔과 차별화된 부분이었다. 싱글룸은 하룻밤에 10디나르로 생각보다 높았다. 더 이상의 대안도 없었다. 클리프호텔 사장은 무척 친절한 편이었지만 만수르호텔의 직원 로하이의 살가움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짐을 옮기고 시티투어에 나섰다. 두바이의 열기가 숯가마의 꽃탕 정도였다면 암만은 중탕 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견딜 만한 온도였다. 처음 찾아간 곳은 숙소에서 멀지 않은 로만극장. 이번 여행 첫 번째 유적 탐방이었다. 대학 시절 배낭여행으로 찾은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앞에서 입장료가 아까워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로만극장은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제법 큰 규모로 음악당·박물관·신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원형극장은 AD 2세기 안토니우스 황제 시절 건립돼 1957년 복원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 역시나 유적지는 내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원형극장을 보고 바로 앞 언덕에 위치한 시타델로 향했다. 좁은 골목길을 한 20분쯤 따라 올라가면 시타델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은 암만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850m)에 있으며, 1.7km에 이르는 성벽 안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철기·로마·비잔틴·우마이야 왕조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이 보존돼 있다. 특히 시타델에서는 암만의 구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요르단의 대형 국기 게양대도 볼 수 있다.
시타델을 둘러보고 어렵지 않게 미터로 다운타운까지 간다는 택시기사가 있어 뒷좌석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두꺼운 안경을 낀 덩치 큰 사내가 내 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며 손을 흔들어 댔다. 그는 다짜고짜 다운타운으로 가자며 내가 잡아놓은 택시에 타려고 했다. 합승이야 문제가 아니었지만,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한마디는 내 머리털을 곤두서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암만 다운타운, 나인틴 달러."
'뭐야 얘!'
1디나르면 되는 거리를 미화 19달러에 가자는 미친놈이 있다니... 그것도 먼저 가격을 제시하는 이런 한심한 짓거리는 내 상식으로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다. 택시기사의 눈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져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친구는 암만의 독사 같은 택시기사에게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아니 이건 먹잇감도 아니었다. 만취한 채 지갑을 손에 쥐고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것보다 못한 짓이었다.
택시기사의 얼굴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상기돼 있었다. 어떻게 사람 얼굴이 저토록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택시기사는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선 "오케이"를 연발했다.
택시기사는 지도를 찾아 목적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사내를 어서 차에 타라며 앞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리곤 룸미러로 어이없어하는 날 보며 조용히 검지를 입술 한가운데 갖다 댔다.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는 사인이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자리에 앉은 친구는 암만이 아주 아름답다며 감탄사를 난발했다. 난 한숨을 토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택시기사는 초등학교 동창이라도 만난 것처럼 과도한 미소와 호탕한 웃음으로 옆자리 친구의 비위를 맞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차마 눈뜨고 못 볼 광경이었다. 둘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이 친구는 폴란드에서 온 대학생으로 역사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친구들과 단체관광을 왔는데 시간이 남아 자기만 시타델을 보러 왔다고 했다. 사이즈가 딱 나오는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내가 한마디를 하려고 하자 택시기사는 번개같이 고개를 돌려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는 애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이걸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택시기사의 행동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택시기사들이 손님들을 이렇게만 대해준다면 여행이 한결 편안해질 것 같았다. 돌아가신 테레사 수녀가 환생한다고 해도 저렇게 손님을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 순간만큼은 이 택시기사를 암만의 천사로 불러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결국, 나는 택시기사의 오버를 보며 꾹 참고 있던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택시 안의 세 남자는 모두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다운타운에 도착한 뒤 택시기사는 뒤쪽으로 몸을 돌려 내게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1디나르란 얘기였다.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성격 탓에 그냥 내릴 수가 없었다.
"원 디나르! 원!"
택시기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내 손에서 돈을 빼앗듯 가져가며 큰 소리로 웃음을 이어갔다. 어찌나 거짓 웃음이 힘들었는지 택시기사는 토끼눈이 돼 있었다. 역시 내 성격상 이 정도로는 성미가 풀리지 않았다. "이 친구, 학생이야. 암만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택시기사에게 당부를, "암만에 대해서 공부 좀 해!" 얼빠진 폴란드 친구에게는 충고를 남겼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둘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소심한 반전을 노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영업을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분명 얼뜨기 친구는 19달러를 헌납하고 기분 좋게 택시에서 내렸을 거다. 택시기사에게는 분명 수지맞은 날이었을 거고.
여행 정보
배낭여행자들의 숙명 '네고', 이것만 지켜라!
▲ 당당해라. 돈을 내는 건 나다.
▲ 아니다 싶으면 뒤돌아보지 마라. 네고의 상대들은 차고 넘친다.
▲ 절대로 택시기사들의 말을 믿지 마라.
▲ 적정선이라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줘라. 결국, 깎는 가격은 많지 않다. 뭐든 적당히 하자.
▲ 최저가에 목매지 마라. 여행 전체의 분위기를 다운시킨다.
▲ 모르면 당한다. 알아야 협상이 된다.
▲ 단체라면 최대한 인원이 많은 걸 활용해라. 협상은 혼자일 때가 가장 힘들다.
체육을 전공하고 있는 22살의 건강한 처자 진원이를 만난 건 만수르호텔에서다. 1년 넘게 해외를 떠돌고 있는 진원이는 당차고 솔직했다. 거침없지만 신중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이 많은 나이답게 진원이의 질문 중에는 진로에 대한 것이 많았다. 난 좋아하는 걸 먼저 찾으라고 했고, 진원이는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릴 적 꿈을 잃어버린 내가 이런 조언을 해도 될까 싶었다. 나도 날 찾으러 여행을 떠나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진원이와 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시티투어를 마치고 진원이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진원이는 나의 경험을 궁금해했고 난 그런 모습을 통해 15년 전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원이와 난 의기투합해 다음날 '와디 무지브(Wadi Mujib)'로 협곡 트레킹을 가기로 했다. 사해를 보고 암만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와디 무지브를 알게 됐고, 사진을 찾아보니 내 눈을 단박에 사로잡는 곳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와디 무지브는 요르단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잘 보존된 곳 중 하나였다. 암만에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로 이동에 대한 부담도 적었다.
가는 길에 사해를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최상의 조합은 택시 대절 비용을 가장 절약할 수 있는 4명이다. 일본 친구들은 4명을 맞춰 다음날 와디 무지브와 사해를 보고 온다고 했다. 떠나든지 기다리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쪽수에서 밀렸지만, 더 고민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우리는 떠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와디 무지브까지 택시 대절비용은 25디나르였고, 입장료가 15.5디나르였다. 오전 10시 30분 택시기사가 숙소로 찾아왔다. 시골 아저씨처럼 생긴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 출발하자마자 택시기사는 나에게 담배를 권하며 이것저것 질문을 이어갔다. 어제 경험한 택시기사의 연기력이 오버랩됐다.
암만을 벗어나자 성경에 나오는 '광야'란 표현이 딱 어울릴 법한 황량한 구릉지대가 펼쳐졌다. 조금 더 가자 'Dead Sea'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물속에 들어가면 몸이 둥둥 뜨는 것으로 유명한 사해였다. 염분의 농도가 높아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다는 곳. 여기선 이곳을 '암만 비치'라고 부른다.
물이 증발하면서 남은 소금이 해안선을 따라 하얗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 건너편은 이스라엘 땅이었다. 암만에서 만난 많은 여행자는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간다고 했다. 사해의 풍경을 감상하며 조금 더 달리자 와디 무지브 매표소가 나왔다. 수영복과 구명재킷을 입었다. 계곡에 들어서자 자연스레 탄성이 흘러나왔다.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협곡은 마치 사포로 밀어놓은 듯 매끄러웠다.
"여기 오길 진짜 잘한 것 같아요!"
진원이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대 이상인데, 정말!"
협곡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물살은 점점 거세졌다. 장대한 협곡의 깊이는 햇빛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깊고 웅장한 협곡은 난생처음이었다. 카메라 앵글로는 협곡의 크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협곡의 폭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는 변화무쌍한 코스는 외계행성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물살을 가르며 걷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빨리 걸을 필요도 없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자연이 만든 경이로움을 감상하며 한발 한발 내딛으면 그걸로 족했다. 협곡안으로 들어갈수록 벌어진 입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 작은 폭포가 앞길을 막아섰다. 로프를 잡고 다리를 최대한 찢어 바위에 올라타야 하는 난코스였다. 경사면을 타고 거센 물살을 맞으며, 목까지 차오르는 수심을 이겨내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먼저 진원이가 시도했다. 체대생이라 내심 기대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밧줄을 잡고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진원이는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허우적대기 바빴다. 그렇다고 내가 젊은 처자의 엉덩이를 밀어 올릴 수도 없었다. 따로 안전시설이 없어 겁을 먹게 했던 '천연 미끄럼틀', 사포로 밀어놓은 것 같은 바위가 마치 외계행성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요르단 여성이 우리를 도와주겠다며 다가왔다. 그녀는 이슬람 여성답게 입고 쓰고 가리고, 격식있는 복장으로 협곡 트레킹을 즐기고 있었다. 와디 무지브보다 더 대단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과감하고 힘차게 진원이의 엉덩이를 밀어 올렸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바위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이번엔 내 차례였지만 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히잡을 곱게 쓰고 있는 그녀에게 내 엉덩이를 조건없이 맡긴 뒤에야 험난한 코스를 통과할 수 있었다.
난코스가 나올 때마다 저길 어떻게 올라가나 싶었는데 요르단 사람들은 그때마다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무지막지한 협곡의 스케일 앞에서 우리는 즐겁기만 했다. 물속에 앉아 있으니 물고기들이 내 살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닥터 피쉬'였다. 그간의 여행으로 제대로 제거하지 못한 각질이 좋은 먹잇감이 됐다. 한 시간 넘게 협곡을 거슬러 오르자 드디어 종착점인 폭포가 나왔다(20명 이상의 단체라면 폭포 위까지 올라갈 수 있다).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폭포 밑으로 들어가니 천연 두피 마사지가 따로 없었다. 가장자리로 더 들어가자 고개가 덜덜 떨릴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 시원하게 두피마사지를 하곤 방수기능이 있는 등산용 드라이색에 넣어둔 카메라를 꺼냈다. 두 손 두 발을 다 사용해야 하는 난코스가 많고, 물이 목까지 잠기는 수심 깊은 곳도 있어서 와디 무지브에 카메라를 가져오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나도 출발 전 카메라를 챙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곳에 어찌 카메라를 안 가져올 수가 있단 말인가. 욕심을 좀 냈다. 다행히 드라이색이 톡톡히 자기 역할을 해냈다. 카메라를 꺼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와디 무지브 최고 인기남으로 손색이 없었다. 다들 내 이메일주소를 물어보기 바빴다.
올라가는 길이 온몸을 다 써야 하는 난코스였다면 내려가는 길은 공포심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매끈한 바위를 미끄럼틀 삼아 최고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그시 두 눈을 감고 바위에 몸을 맡겼다. "풍덩" 워터파크 부럽지 않은 짜릿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여행은 가끔 생각지도 않은 장소와 상황에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며 기쁨과 행복을 안겨준다. 우린 그걸 '인연'이라 부른다.
여행 정보
요르단에서 이스라엘을 다녀올 때 여행자들이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비자면제협정을 체결한 국가로 여권만 있으면 90일간 체류할 수 있다. 그러나 여권에 이스라엘 입국 도장이 있으면, 다른 이슬람권 국가에서 입국이 거부될 가능성이 크다. 이스라엘 입국 시 별도의 종이에 입국도장을 찍어달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여행 루트를 짤 때 꼭 고려하자.
* 이 글은 <오마이뉴스> 김동우 시민기자가 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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