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면목동: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모든 계절엔 다른 향기가 있다. 여름에는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향이, 가을에는 잔뜩 머금고 있던 수분을 토해낸 낙엽의 쌉싸름한 향이, 겨울에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 불어오는 잔뜩 얼어붙은 누군가의 두툼한 솜이불향이.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보면 꼭 그 향기를 품고 있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누군가와 함께 서울에서 전시를 보았던 기억, 인천 낡은 극장 안에서 혼자 영화를 보았던 기억. 누군가와 함께였던 혼자였던 그 기억들은 그때의 장소에 머물러있다.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지역에 안착한 후, 어스름한 노을 저녁에 사로잡혀 추억에게 뒤통수를 맞는 날이면, 당장이라도 옛 동네로 돌아가 추억에 빠져 한껏 거닐고 싶다.
다행히도 나의 옛 동네는 아직 그 자리에 남아있다. 지하철이 뚫리고 몇 개의 건물들이 사라지긴 했지만, 어릴 적에 부모님과 살던 낡은 아파트와 빌라, 초중고등학교는 아직 그 자리 그대로다. 살다 보면 기억하는 그대로 그 장소가 남아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감성에 빠져 사는 것을 사치로 여기고 공감받기 힘든 사회생활 속에서 옛 동네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은 또 하나의 힐링이다. 아팠던 기억을 추억으로 흘려보내는 치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면목동: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면목동에서의 공통된 추억을 가진 2030세대 여성 세 명이 둘러앉아 행복한 기억 속에 빠지면서도, 소화되지 않고 목구멍에 가시로 남은 상처들을 들쑤셔내 서로가 가진 오해를 풀어나간다. 공연 중간중간 상영되는 철거될 면목동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는 지하 공연장을 확장시키며, 인간이 가진 문제의 형태를 기억 속 옛터전으로 옮긴다. 사라질 면목동은 그들이 가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흘러가 버릴 것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외면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면 될 그들은 서로 치열하게 싸우면서 해결의 과정을 겪는다. 어쩌면 이들이 문제를 알고 풀어나가는 것처럼, 면목동이라는 곳 또한 단순히 철거라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것이 아니라 정확한 문제를 제시하고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해결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극의 후반부 다큐멘터리 영상 속에서는 면목동에 사는 어린아이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각자 자기가 사는 동네의 보석같이 소중한 부분을 꺼내 놓는다. 난 저 나이 때 나의 동네를 특별하게 생각했었을까? 그 순간을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것 같아 반성하게 된다. 인터뷰 중 한 아이가 면목동과 관련된 교가 같은 노래를 부른다. 그 순간, 가슴 속으로 이 극이 곧바로 내 안으로 들어온다.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내려간 어둠 속에서 잠시, 나의 옛 동네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메어온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든 것을 추억으로 흘러가게 만들어 주었던 ‘동네’… 랜덤으로 설정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걱정말아요 그대’ 기타 커버곡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