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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묘미 Nov 17. 2022

수장고 속에 영화와 감옥에 갇힌 감독

입시 때 적었던 시놉시스를 떠올리며

고3 교실에서 수시 합격생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자기의 길을 개척하려는 한두 명의 학생들은 벌써 우리와 다른 어른이었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수시를 광탈하고 정시를 기다리는 학생들만이 야간 자율학습을 하려고 교실에 남았다. 듬성듬성 빈자리가 많아서 허전한 교실 안에 숙연함이 감돌았지만, 학구열은 맹렬히 불타올랐다.


난 뒤늦게 창작에 빠졌다. 그 수단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영화를 선택했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단편영화를 만들어 청소년 영화제에서 본선 진출을 하며 의지를 증명했다. 하교 후 학원에 갔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공부를 하고 잠들었다. 그리고 3시간 뒤 다시 등교하는 생활의 반복 속에서도 꾸준히 영화 공부를 했다. 영화과에 진학하는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영화과가 있는 대학에 원서를 넣고 몇 군데에서 작문시험과 면접을 봤다. 하나 같이 불합격했다.


불합격한 경험이 노하우로 쌓였다. 정시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겼다. 면접 때 교수님께 받았던 질문과 내가 했던 대답을 곱씹어 보며 면접 중독자처럼 합격생의 후기를 찾아봤다. 작문시험을 준비하며 그림카드를 만들어 무작위로 뽑아 시놉시스를 적는 연습을 했다. 대학에 정시 원서를 넣고 다시 시험을 보러 갔다. 연습 덕분인지 작문 시험지를 받는 순간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2차 구술면접시험을 보려고 강의실에 들어가니 근엄한 표정의 교수님이 내가 적은 시놉시스에 대해 물어봤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적었던 이야기는 이랬다.


때는 대략 500년 후. 배경은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처럼 기계와 인간으로 가득한 어두운 미래의 지구다. 이곳에서 영화는 오래전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춘 매체다. 주인공인 ‘나’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탑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속처럼 꾸며진 내부로 들어와 감옥을 발견한다. 감옥 안에는 한시대에 유명했던 거장 영화감독들이 갇혀있다. 그들은 내게 꼭대기 층으로 가라고 말했다. 맨 앞칸으로 향하는 <설국열차>(2013) 같이 앞을 가로막는 적과의 혈투는 없었다. 가구 하나 없는 휑한 꼭대기층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거대한 기계만 불길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초대형 필름 영사기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대장이 한 명 서 있다. 대장에게 영화감독들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듣게 된다. 그들이 만든 영화가 세상을 타락시켰고 부도덕한 사회를 낳았다는 죄목이다. 영사기에서 쏘아진 빛이 창밖에 내려다보이는 도시로 향한다. 빛은 인간, 건물, 기계, 음식, 거리 등 세상의 모든 형태를 만든다. 멸종된 공룡 조차도 살아서 우리에 갇혀있다.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



우연히 읽게 된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책에는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코로나로 영화산업이 셧다운 되었던 시기에 영화의 미래에 대해 고민한 짧은 글들이 실려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영화과 입시 시험 때 적었던 시놉시스가 떠올랐다. 모든 영화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간절했을 때 적었던 글이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영화를 감상하는 수단에 큰 변화가 일어난 현재. 영화 소멸의 출발 신호를 들은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든다. 몇 백 년, 몇 천 년 뒤 영화가 어느 박물관이나 미술관장의 소유물로서 수장고에 보관되었다가 큐레이터의 기획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는 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중학생 때까지 꿈은 부모님의 장래와 동일하게 공무원이었다. 운동과 액션 영화를 좋아했기에 경찰 공무원이 되려고 했다. 일본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의 감동적인 이야기 속의 경찰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니 마음이 자꾸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독서를 좋아하고 종종 시와 수필을 적어 커뮤니티에 올리는 것이 취미였다. 엉뚱한 상상을 많이 했던 난 친한 친구에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의 존재를 알게 되며 영화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마음먹었다. 부모님 눈에는 터무니없는 나의 선택이 철없어 보였던지 다툼이 계속됐다.



<시네마 천국> (1988)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은 한 방향으로 길게 뻗어나가 목표했던 상에 맺힌다. 중간에 무언가 침범한다면 빛은 목표로 했던 곳에 닿지 못하거나 변형된다. 부모님의 아들은 설계했던 목표에 맺히지 못했다. 나아가던 빛이 무언가의 침투로 인해 중간에 끊긴 것이다. 사실 나도 왜 그 빛이 다른 쪽으로 뻗어나갔는지 알지 못해 아직도 그 이유를 찾는 중이다. 중간에 침범해 소심한 나를 움직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부모님이 만들어놓은 지점에 정직하게 맺혔다면 지금쯤 찬란하고 만족한 인생이 상영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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