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새가 둥지를 짓고 포란하는 계절을 지나, 아기새들이 훌쩍 자라 둥지 밖으로 나오는 계절이 되었다. 요즈음 산책 하다 보면 높은 소리로 ‘째째-‘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빼배-‘ 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작은 새보다 더 작은 아기 새들이 높게 재잘거린다. 귀를 기울이면 나에게만큼은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듯하다. 새들은 성대구조가 인간과 달라서 우리의 말로는 도무지 옮기기 힘든 소리를 낸다. 그래도 자꾸 듣고 미숙하게나마 비슷하게 발음해 보며 되새기면 어느 순간 새소리가 귀에 익는다. 예전에는 주로 시각이나 촉각적 자극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꼈다면, 지금은 청각적 자극이 더해져서 세상을 한 차원 더 입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듯하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올 무렵에는 많은 새들이 짝을 찾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평소에 듣던 새소리보다 음의 높낮이가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로 더 오래 이어진다. 목소리를 바꾸는 새들도 있다. 여름 철새인 꾀꼬리가 대표적인데, 짝짓기 노래를 부를 때 꾀꼬리의 목소리는 높고 청아하며 우아하다. 높은음으로 플루트를 부는 소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꾀꼬리의 짝짓기 노래를 들어보면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에게 왜 꾀꼬리 같다고 하는지 대번에 납득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평소 꾀꼬리 목소리는 그야말로 완전 ‘깬다’. 둥지 옆에 앉아있는 꾀꼬리의 소리를 우연히 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저 ‘꽥’하고 부르짖는 소리 같았다. 처음엔 그것이 꾀꼬리 소리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꾀꼬리는 목소리 좋고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한 새의 대명사 아닌가. 그러면 평소 목소리도 아름다워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꾀꼬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함께 목격한 남편에게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꾀꼬리 완전 사기결혼 아니야?”
남편은 어쩐지 수컷 꾀꼬리를 대변하듯 말했다.
“노래 부르느라 목이 다 쉬었나 봐…”
남편의 변론 아닌 변론에도, 나는 여전히 꾀꼬리 수컷이 괘씸하다고 느껴졌다. 암컷 꾀꼬리는 노래 부르는 목소리에 반해서 자신의 짝으로 그 수컷을 택했을 텐데, 그 목소리를 평소에는 들려주지 않는다니… 내가 암컷 꾀꼬리라면 서운할 것 같았다. 새들을 보면서 이렇게 감정을 이입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가장 감정을 많이 이입하게 되는 때는 역시 새들이 육추를 할 때다. 대부분의 새들은 인간의 눈을 피해 둥지를 짓기 때문에(제비는 드물게 인간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독특한 새다.) 직접 새끼를 키우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지만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필 무렵에 새들의 행동을 유심히 보면 아기 새를 위해 쉴 새 없이 먹이를 나르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남편과 나는 새들을 보기 위해 누구보다도 느리게 공원을 걷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새소리에는 한없이 선택적으로 열려있는 귀를 함께 장착하고. 새소리에 함께 반응하고 멈춘다. 나무 위에서 들리는 것 같으면 나무 위를, 덤불 속에서 들리는 것 같으면 덤불 안을 톺아본다. 물론 직접 가서 뒤적이면 새들이 경계하여 진작에 더 멀리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쌍안경이 필수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쌍안경을 갖다 대고 조용히 숨을 죽인다. 소리의 주인을 발견하면 우리는 새의 위치를 속삭이는 말로 공유한다.
“덤불 바로 위, 가장 오른쪽 나뭇가지 끝에 앉아있어. 지금 쟤가 먹이 찾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다 박새의 육추 현장을 꽤 오래 지켜본 적이 있다. 벽돌로 만들어진 담장 안에 구멍 뚫린 작은 공간으로 벌레를 문 박새가 쏙 하고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늘 근처의 나뭇가지에 앉아서 잠깐 갸웃갸웃하며 좌우, 위아래를 살피는 듯했다. 들어간 지 1분도 안 되어 나올 때는 구멍 밖으로 쏜살같이 직진하여 날아갔다. 금세 다시 박새가 날아왔는데, 먹이를 그렇게 빨리 구하지는 못했을 테니 아마도 엄마새와 아빠새가 번갈아가며 둥지를 분주하게 방문하며 먹이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지켜보니 엄마새와 아빠새의 모습이 쑥대강이가 되어있었다. 아기 새들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다니느라 제 깃털을 고를 시간도 없어 보였다. 털도 좀 빠진 것 같고, 수척해 보이기까지 했다.
새들에 대해 잘 모를 때는 조류의 출산이 포유류의 출산보다 더 쉬워 보였다. 막연하게, ’ 사람도 알을 낳으면 좋을 텐데…‘ 생각했던 적도 있다. 만약 사람이 알로 태어난다면 진작에 현대사회의 기술력으로 24시간 내내 몸으로 품지 않아도 온도와 습도, 어떤 조건들을 쉽게 유지해 주는 장치를 개발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새들이 알을 낳는 방식으로 진화하게 된 것은 천적을 피해 빠르게 날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날아야 하니까, 최소한의 기간만 몸에서 품어 알인 상태로 먼저 낳고 미성숙한 알을 여러 날 품어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도록 했다. 대신 그 이후에도 한 달가량, 아기 새가 둥지에서 스스로 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새들은 자신의 온 시간과 능력을 바쳐 자식을 돌볼 수밖에 없다. 포란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다. 알을 품으며 둥지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천적에게 공격당할 수 있는 큰 위험요소다. 그런 와중에 새들은 인간과는 달리 조금이라도 몸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육아템’은 전혀 없다. 얼마 전 아이를 낳은 시동생이 분유를 타는 모습을 보며, 시어머니는 ’ 요즘은 참 아이템이 많아서 좋겠다 ‘ 고 하셨다. 물을 끓이고 찬물과 적정 비율을 섞어서 분유 온도를 직접 맞추는 대신 분유와 물을 섞어 ’40도‘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많은 시간과 노동이 절감되었다. 새삼 인간이라서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이토록 짧은 기간, 서른몇 해만에 새로운 도구를 끊임없이 개발하여 자신의 종의 육아 방식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종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문명의 혜택을 여러모로 입었어도 육아의 힘든 부분은 나열하자면 끝이 없기는 할 테다. 육아의 본질은 결국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전과는 다르게 피곤하고 수척해질 수밖에 없는 건 만국 공통, 표정을 지닌 온 생명체의 공통이 아닐까. 온몸으로 아기 새를 길러내는 부모 새들을 보며, 이제는 둥지를 나와 독립을 준비하는 아기 새들을 보며 새삼 모든 생명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니 꾀꼬리 수컷도 재평가해줘야 할 것 같다. 그야말로 꾀꼬리 성대를 가졌어도 육아를 하느라 노래 연습을 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암컷이 육아를 하느라 고생하는데 수컷 혼자 치장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암컷은 더 서운했을 것이다. 꾀꼬리도 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목소리도, 모습도 아름답지 않아도 육아를 하는 것만으로 경이로운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니까.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