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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Jun 03. 2022

고시원 생활에서 행복 찾기

서울살이 몇 핸가요(7-8년 차, 2016.9~2017.2)

고시원에 살아본 이후로 내 시선에는 인간이 두 종류로 보였다. 고시원에 살아 본 인간과 살아보지 않은 인간. 고시원은 반지하 또는 옥탑 원룸과 더불어 최악의 주거환경으로 대표되는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최악의 주거환경을 겪어본 자와 겪어보지 않은 자로 나뉘는 것이다. 이 또한 ‘내 기준 최악’인 것이지만, 최악의 환경처럼 보여도 그곳은 내 상황에 따라 어쩌면 최악이 아닐 수도 있다. 고시원에서 내가 배운 것은 최악의 환경에서 최악이 아닌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투룸’이라는 집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고시원이라는 ‘방’에서 사는 자로 되돌아가면서 살림살이를 무척 많이 줄일 수밖에 없어서 온갖 가구와 가전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고시원에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그 기분이 홀가분했다. 이때 새로운 방을 얻은 게 아니라 고시원으로 들어가게 된 까닭은 당시 다니던 회사가 지방으로 기관 이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새로운 방을 얻기가 애매해서 고시원에서 몇 개월 살다가 나중에 그 지방으로 함께 내려갈 생각이었다.


모든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생활자에서 다시  생활자가  내가 선택한 ‘ 작게나마 창문이 있는 방이었고, 정말로 코딱지만 하기는 하나 개인 샤워실  화장실이 있었다. (양팔을 양옆으로 반정도씩만 펼칠  있을 정도, 그러니까  팔꿈치가 양옆의 벽에 닿을 정도였다. 샤워를 변기 위에서 겠다? 그렇다.) 그리고 건물에 옥상이 있어서 빨래를 외부에 널수도 있었다. 그런 점들이 고시원 치고는 나름대로 쾌적했다. 여성 전용 고시원은 아니었지만 공동 출입문의 보안 시스템과 상시 감독하는 운영자  관리자가 있었고, 복도에 CCTV 또한 있어서 구옥 투룸에  때보다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낄  있었다. 방에 딸려있는 작은 에어컨은 작은 방을 금방 시원하게  주기에 충분했고, 겨울에 바닥 난방도  뜨끈해서 내가 따로 조절하지 않더라도 춥거나 덥지 않게  주었다. 고시원만의 복지  가장 좋은  공동 주방에  김치와 라면, 짜파게티, 밥이 준비되어있고 정수기에서 물을 원하는 만큼 마실  있다는 점이었다. 자취를 해본 사람은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생활비를 꽤나 아껴준다는 .


구옥 투룸에서 ‘탈출한’ 나는 의외로 좁은 고시원 생활에 금세 적응했다. 다만 고시원의 어쩔 수 없는 특성상 오래 있다 보면 얇은 벽 사이로 전달되어오는 옆방의 소음에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방’ 밖에서 보내며 고시원에서는 그야말로 잠만 잤다. 회사까지 자전거 타고 15분이면 가는 거리에 방을 얻었기 때문에 출근 40분 전쯤 일어나 후다닥 채비를 하면 정시에 출근할 수 있었다. 또한 정시 퇴근을 하면 오후 6시 반이었다. 왕복 세 시간의 출근길에서 왕복 삼십 분 출근길 삶으로 변화했다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방 크기를 포기한 대신 저녁이 있는 삶을 얻은 나는 퇴근 후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시작한 운동이 클라이밍이다.


왜 하필 클라이밍이었는가 하면, 당시 나의 친오빠가 클라이밍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느 회원이 반품한 암벽화가 남는다며 나에게 한 번 해보라며 주었고 나는 마침 장비가 생긴 김에 해볼까 하는 참에 하게 되었다. 그때 내 몸은 2년의 불규칙한 대학원 생활과 지옥 같은 출퇴근, 잠을 못 이루던 지난 몇 년의 피로가 누적되어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다. 거짓말처럼 마침, 고시원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클라이밍 센터가 있었다. 퇴근 후에 할 일도 없고, 갑자기 모르는 동네로 혼자 이사 와서 친구도 없던 나는 망설임 없이 클라이밍 센터에 등록했다.


그때부터 내 일상의 루틴에 클라이밍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클라이밍을 시작하자마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일상에 행복이 없던 그때, 나는 그 허기를 채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퇴근하고 클라이밍 할 시간만 애타게 기다리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당시에는 거의 주 7일 클라이밍 센터에 꼬박 출석을 하면서, 퇴근 후 식사를 간단히 때우고 오후 7시쯤 가면 센터가 문 닫는 시간인 오후 11시까지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를 사귀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만난 그 친구 중에 한 명이 나중에는 연인이 되었고, 나의 배우자가 되었다. 누가 알았을까, 3평 고시원에서 생활했던 그때가 10평 투룸에서 살았던 때보다 행복할 수 있을 거란 사실을. 행복의 조건은 집의 크기에 있지 않다는 걸, 나는 그때 배웠다. 내게 행복은 안전하다는 감각이었고,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는 것이었고,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고, 기나긴 출퇴근 길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었다.


고시원 생활 5개월 만에 회사는 계획대로 지방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고, 나는 입사할 때의 계획과는 달리 퇴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그 회사를 위해 지방까지 따라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서울에 남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내게는 급하게 얻은 일자리보다 겨우 겨우 찾은 내 인생의 운동, 클라이밍과 친구들이 더 소중했다. 오로지 퇴직금을 받기 위해 1년을 버티자는 마음으로 남은 몇 개월의 시간을 서울에서 진천까지 출퇴근하며 버티기로 결정했다. 퇴사를 결정한 뒤에 양재에서 강남 인근 사이에 원룸을 구했다. 퇴직금을 위해 남은 4개월 간 진천으로 내려가는 통근 버스를 주 5일 동안 타야 했는데, 서울에서 통근이 가장 수월한 위치가 강남 또는 양재였기 때문이다. 또한 퇴사한 뒤에 다른 업종으로의 이직할 생각이기도 했는데, 그 취업 준비를 위해 강남 인근의 학원을 다닐 계획이었다. 모두가 왜 하필 서울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강남에서 원룸을 구하냐고 할 때, 내게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얘기했을 때 누군가는 끄덕끄덕 했고, 누군가는 다시 생각해보라 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렇게 사는 이유’에 모든 사람을 납득하게 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 따위가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당시의 내가 스스로를 위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로써 그게 최선의 결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시원 보다는 약간 더 큰, 4평 원룸에 들어가게 되었다. 충분히 좁은 방에서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이제 좁은 방이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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