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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위장한 게으름

책임

by 오구리

아침 7시, 눈을 뜨고는 부엌으로 향한다. 입을 헹구고 물을 한 잔 마시고 나니, 그제서야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분주하게 느껴진다. 부엌 한 켠에서는 음식이 되려 하는 식품들과 그것을 먹이고 보내려고 하는 엄마의 모습이 딱 아침답게 바빠 보였다. 고개를 돌려 엄마를 보고는 "출근하기 귀찮아" 한 마디를 던지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어제 밤늦게 먹은 짜파게티와 라면은 어두운 아침의 해 같았다.


식탁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깨작깨작 많이도 먹는다. 무려 한 시간을 식탁에 앉아 '박은영의 FM대행진'을 듣는다. 늘 끝까지 듣는 코너가 있다. '그냥 걸었어!' 마카오 항공권을 걸고 신청한 불특정 다수에게 전화를 걸어 들리는 노래의 한 소절을 이어서 부르는 코너이다. 전화를 받은 청취자의 대부분은 출근을 하다 전화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마카오 항공권 때문인지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텐션을 듣다 보면 그제서야 출근 준비를 해야 할 것만 같아 식탁에서 일어난다.


대충 말린 머리와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옷을 입고, 도시락 가방을 들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집 앞 정류장에는 3대의 버스가 지나간다. 한 대의 버스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버스, 다른 버스는 회사 앞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 나머지 한 대는 비슷하게 가다가 다른 방향으로 빠지는 버스이다.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가장 빠른 방법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버스이지만, 어떤 버스를 타더라도 회사에는 도착한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에 오른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높은 파티션 틈 사이로 몸을 숨긴 채 노트북을 꺼내고, 책상에 적어 놓은 메모를 확인한다. 해야 할 일의 데드라인을 큼지막하게 적어 자석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커피를 마시며 메모를 보다 보면 금세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근처 온갖 식당을 다 가보았지만, 메뉴 고르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다. (고르지 못하면 늘 돈까스를 먹었다. 먹고 나면 점심시간 끝난다.) 그래서 도시락을 싸기로 했고, 다 먹고 나면 무려 4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 빨리 점심을 먹고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에 앉아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정리한다. 재 아무리 귀찮아도 해야만 하는 일, 데드라인이 임박한 일은 어떻게든 하기 마련이다.


"그 순간에 닥치면 어떻게든 다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가진 게 틀림없다. 이와 같은 생각도 잘 포장하면 책임감의 일부이다. 데드라인이라는 시간이 결국에는 움직이게 만드는 책임감이 되어버린다. 정확하게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고, 하기 싫다고 내팽개친 그림자 주머니 속에는 해야 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더 크게 느꼈고. 게으름과 책임감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 따위를 주지 않았다.


즉,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에 직면하게 된 순간 책임감을 더 가진다. 내가 나를 보는 시선보다 세상이 나를 보는 시선이 더 중요한 셈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책임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다만, '매일이 귀찮다고 외치는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순간이 닥칠 수가 있는가?' 생각해본다.


올해가 밝으면서 글을 쓰는 취미가 생겼고, 회사 생활을 통해 자유와 책임, 인정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을 재미있고, 멋지게 쓰고 싶었다. 귀찮음을 이겨낼 수 있는 계발까지 도달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게으른 나에겐 꾸준히 글 쓰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 일보다 글 쓰는게 더 어렵기도 하다. 나는 컴알못 프로그래머이다.)


귀찮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고 늪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은 것 같지만. 근차근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나의 시선과 세상의 시선의 균형을 맞춰 으로는 고 싶은 일에도 책임을 묻고 싶다.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을 하고 있다. 사실 뭐 아직도 귀찮다. 다만, '박은영의 FM대행진'을 출근하면서 듣고 있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가서 54호선을 환승하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평소보다 무려 한 시간 반이나 일찍 출근하고 있다. 여전히 커피를 마시며 해야 하는 일을 정리한다. 아직 점심시간이 오기까지는 한참 남았다.


아침과 어울리지 않는 라디오의 텐션이 이제는 서서히 이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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