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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남과 남

by 오구리

새까매진 하늘 아래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만큼 짧은 한숨이 새어 나오고 있다. 오랜만에 이 시간까지 야근을 하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준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준영은 주말도 평일처럼 일하고, 매일 같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밥은 먹지 않아 집에만 오면 배가 고프다고 찡찡거렸다. 다만, 준영의 찡찡거림은 최근 사라진지 오래다. 지긋지긋한 회사를 때려치우고는 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준영의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침 길을 걷고 있는 터벅이도 밥을 먹지 않아서 준영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 얼른 도착해 같이 먹을 심산이었다.

...
떠나기 6개월전 부터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매일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어느새부턴가 외국 영화가 아닌 한국 영화를 보며, 그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영화의 명대사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보고는 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드루와. 드루와."
"너 혼자니"
약속이 있어 서둘러 나갈때에는
"넌 계획이 다 있구나."
강식당을 보면서도,
"자 오늘의 첫 번째 주문이다. 봉골레 하나"
맷돌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마시는 이서진의 삼시세끼를 볼때에는,
"맷돌 손잡이가 뭔지 알아요? 이걸 어이라고 해요."

나참 어이가 없어서, 유학준비는 도대체 언제 하는지, 영화를 보면서도 주변정리는 좀 했으면 좋겠는데, 단 한 번도 준영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럴까 싶었다. 가끔 유학준비 안하냐고 물으면
"I am iron man" 을 외치며 약간 미친듯 했다.

...
야근을 해서 그런지 그런 준영이 이상하게도 보고 싶었다. 걷다보니 금새 집에 다다랐고,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준영은 말했다.

"오태식이 돌아왔구나.
반갑다. 근데 그 손으로 뭐 어떻게 하겠냐?
걸어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밥을 먹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고,
오태식이 배고파서 어쩌냐?"
이어서 말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되는게 세상 이치더라.
내가 지금 밥을 지어줄테니까, 달게 먹어라."

준영이 따라했던 대사 중에 가장 완벽한 대사 였고, 응답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 켠에 차려진 밥상이 진짜 있었기에 준영의 대사를 받기로 마음 먹었다.

"꼭 그렇게까지 다 차려나야만 속이 후련했냐. "
난 처음으로 준영의 대사에 반응을 했다. 3초간의 정적이 있고, 우리는 미친듯이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회사 때려치고 유학가는거 후회 안해? 마음 먹은 만큼 정말 열심히 살다와. 하고 싶은거 다하고 후회 없게."


'월세 같이 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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