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카스트는 현재 공식 폐지되었다. 그런데 인도에서 "나는 브라만Brahmin이야." 라고 묻지 않았는데 먼저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마주치게 된다. 브라만들은 항상 먼저 말한다. 그런데 사실 굳이 스스로 PR하지 않아도 그들의 성을 검색해 보면 알 수 있긴 하다.
할까 말까 고민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난 가끔씩 인도에서 여행자 카스트가 있음을 미세하게 느낀다.
물론 요즘같은 세상에 대놓고 그러는 사람은 없다. 요즘 시대 한국인이면 어딜가도 대접받는게 전세계 트랜드이다. 불과 5년전 7년전과도 확연히 다르다. 2015년도에 튀니지를 갔을때도 어떤 아저씨가 "한국인은 가난하니까."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다. 같은 해 터키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런데 유독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있는 나라가 인도가 아닌가 느껴질 때가 있다.
LOVE TEMPLE이라는 곳은, 각종 요가 클라스와 체험형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아람볼 해변에는 이렇게 해변가에 캠핑장을 차려놓고 숙소와 아쉬람, 혹은 요가 체험장을 운영하는 곳이 많다. 그 중에서도 이 곳이 제일 인기도 많고,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하는 곳이다.
숙소는 방갈로형 기숙사로 한 방에 열 댓 명의 침실이 있는 곳이다. 캠핑장형 숙소가 다 그렇긴 하지만 방이라기 보다는 텐트에서 자는 것과 같다. 모기 없고, 깨끗하고 아늑하길 바라면 안된다. 대신 침대마다 모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아, 누군가 여행은 삽질의 연속이라 했었지. 모기장 상태를 제대로 확인을 안한 것이다. 밤이 되자 모기 소리가 스테레오 사운드로 여기저기 동시에 울려댔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간신히 잠을 들긴 했지만 다음날 일어나서 보니 뜨악이다. 모기장 몇 군데가 아주 커다랗게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다.
데스크에 가서 모기장 교체해 달라고 말할까 하다, 내가 괜히 쓰잘데기 없는 스위트함이 발동했나보다. 어짜피 자리를 정해주지 않고 first come, first served 식으로 빈 침대를 알아서 찾는 것이다. 굳이 바쁜 직원들 귀찮게 하진 말자. 빈 침대가 하나 있길래 모든 짐을 싸서 옮겼다. 그리고 불꽃튀는 전쟁은 시작되었다.
외출 후 다시 들어와 보니 옮겼던 내 짐들이 원래의 침대에 와 있었다. 대신 새로 짐을 옮겨놨던 침대에는 누군가의 짐이 있었다.
"이런, 누군가 실수했군."
그럴 수도 있지, 혼자 이러면서 내 짐을 다시 새 침대에 옮겼다. 그리고 나서 데스크를 찾아갔다. 모기장이 구멍이 많아서 도저히 잘 수가 없어서 침대를 옮겼는데,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다. 물론 데스크 직원들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새로 옮긴 침대를 쓰라고 말한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새로 옮긴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있었다.
너 지금 내 침대에서 뭐하는거야!
깜깜한 어둠 속에서 심술난 아이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네덜란드 여자 2명이었다.
"이거 내 침대라구!!" (네덜란드인)
"이거 오늘 아침 내가 먼저 차지한건데, 나한테 그러지 말고 데스크에 가서 해결할래?" (나)
네덜란드 애들이니 좀 이성적으로 대응하겠지, 이러며 난 릴랙스한 채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후 그들은 청소직원을 대동하고 왔는데, 청소직원은 나에게 후레쉬를 비추며 말한다.
"이거 저 여자분 침대이니 얼른 일어나세요. 빨리 옮기라구요." (인도인)
자신이 노숙자 단속하러 나온 경찰인줄 아나보다. 길거리 취식 떠돌이 신세가 남의 집에 주거 침입했다는 듯이 말한다.
"이거 내가 먼저 차지한 거에요, 데스크 직원한테도 확인받은거라구요." (나)
"먼저 있던 침대에서 왜 옮긴거지?" (네덜란드인)
이거참, 얼굴만 가리면 똑같군. 그들이 말하는 목소리에는 '이런 어디서 못배운 인간이 추태를 부리고 있어' 이런 경멸이 담겨있었다. 내가 왜 그들에게 침대를 옮긴 이유까지 고해 바쳐야 하는거지? 남의 짐을 마음대로 치워버린 것도 불쾌한데 대체 저런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건지.설령 정당한 이유 없이 그랬다 해도 저렇게 남이 먼저 차지한 자리의 짐을 얄짤없이 내팽개치고 내 자리라고 선언하는건 무모한 용기가 아니고서 쉽지 않은일이다.
"먼저 있던 침대에서 옮기지 말란건 니들이 만든법이야? 왜 니들 맘대로 한마디 말도 없이 남의 짐을 옮기니? 이건 아침 일찍부터 내가 차지한 침대고, 직원들도 확인해준거라구. 대체 자고 있던 침대에서 나가라는건 무슨 횡패라지?" (나)
나는 여행지에서 왠만하면 조용히 있는 편이다. 좀 억울해도 그런대로 좋게 생각하며 마인드 컨트롤하는 편인데, 나 스스로 즐거운 여행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저들은 잠자는 한국인의 코털을 건드렸나보다. 나는 실성한 듯이 그 셋을 향해 소리쳤다. 내 반응에 놀랐는지, 아니면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건지, 기세 등등 비아냥 거리는 투로 말하던 네덜란드 애들도 그대로 아무말 안하고 가버렸다.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건 인도인 청소직원의 태도였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소동의 발단도 그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애들이야 오해가 있었다 쳐도, 그 청소직원의 '여행자 카스트'인 듯한, 나를 향해 '네덜란드 애들을 모셔라' 하는 듯한 그런 태도가 두고두고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