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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Apr 23. 2024

시부모님과 남한산성 나들이

10년 만에 다시 간 추억의 장소

지난 일요일에 시부모님과 함께 남한산성에 다녀왔다. 남한산성은 10년 전쯤 남자친구(지금의 남편)와 한 번 가봤다. 그때 남편이 김밥 도시락을 싸와서 감동 한 스푼 얹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 풍경을 내려다보며 걷는 성곽길도 예뻤었는데.


시부모님은 등산을 즐겨하신다. 거의 매주 산에 가시는 편. 건강한 취미다. 남편도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을 따라 산에 자주 다녔다. 나도 산을 좋아하지만 아쉽게도 등산 체질은 아니다. 예전에 청계산을 올랐을 때, 내려올 때쯤 다리가 후들거려 개다리춤을 추며 내려왔다. 더울 때 오래 걸어서 그랬는지 두통까지 더해져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르기 부담스럽지 않은 산을 좋아한다. 돌이 아무렇게나 박힌 험한 산길이 아닌 평평한 흙길이 이어진 산. 길이 험하면 발을 헛디디지 않으려고 땅만 보고 걷느라 풍경에 집중할 수가 없어 금방 피곤해진다.


다행히 남한산성은 오르기 어렵지 않았던 곳으로 기억에 남아있어, 만만하게 보고 신발도 그냥 뉴발 운동화를 신고 갔다(사실 등산화 없어서 뉴발 신음;;). 그런데 오르면서 보니 아무래도 내 기억의 일부가 지워졌던 듯. 편한 길도 있었지만 내 운동화 밑창이 뚫리겠다 싶은 돌길도 꽤 있었다. 아쉽게도 돌이 콕콕 박혀 오르기 힘들었던 길 사진은 없다. 안전에 집중하느라 사진 찍을 여력이 없었다.


사진 잘못 찍은 거 아니에요 땅이 기울어져있는 거예요 ㄷㄷ


사진으로는 전혀 안 무서워 보이는데 실제로는 더 가팔라서 조금 긴장하며 걸었다(저만요). 길이 좁고 옆으로 경사가 져있어 나의 뉴발 운동화가 언제 슬라이딩할지 모르니까. 집중하며 걷는 나를 보고 시부모님은 뒤에서 웃음을 터뜨리셨다. 헤헤, 웃음 주는 며느리(?).


나는 이런 길이 좋더라


열심히 걸어보자. 힘을 내, 운동화야!


50분 정도 지났을 때 쉼터가 나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와 남편이 꼬마 김밥과 사과를 싸왔고, 어머님은 딸기, 오렌지를 싸오셨다. 소풍 온 것 같아! 역시 밖에서 먹는 도시락은 꿀맛이다. 얼마나 꿀맛이었으면 사진을 못 찍었을까. 다 먹고 치우고 나서야 '아, 찍어서 브런치에 올릴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내가 인스타를 못한다니까.


(쉼터에서 보이는 풍경) 롯데타워가 뾰족 솟아있다


분명 더웠었는데, 김밥을 다 먹어갈 때쯤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추워졌다. 이때부터 컨디션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던 듯.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남편의 길쭉한 다리는 아버님을 닮았다


자연이 주는 초록 에너지가 좋아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에 도착


웅장함이 느껴지는 450년 된 나무


지화문 앞에 450년 된 나무가 수액을 양껏 맞고 있다. 종종 이렇게 아주 오래 산 나무를 볼 때마다 속으로 나무에게 말을 건다.


'나무야, 안녕! 너는 그동안 무엇을 보았니?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니?'


내 인생보다 약 13배는 더 오래 산 나무다. 얼마나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겪었을까. 어쩌면 이전에 다른 생애를 살고 있는 나를 만났을지도.


드디어 성곽길이 나왔다


10여 년 전 흐릿한 기억 속에 남아있던 성곽길을 다시 밟아보는구나! 그때는 없었던 위례 신도시의 빼곡한 아파트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뻥 뚫린 하늘을 보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올라온 보람이 있다.


이 맛에 등산하지요 (자주 하는 척)


남편과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는데, 아버님이 주위를 둘러보시다 말씀하셨다.


"여기가 지금에야 이렇지, 옛날에는 돌 던지고 싸우고... 전쟁하고, 난리도 아니었겠지."


맞다. 이 자리에, 지금의 평온함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을 지켜준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들 덕분에 내가 이 성곽길을 이렇게 편하게 걷고 있을 수 있는 거다. 소풍 나온 기분으로. 감사해야지.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에. 이런 시대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꾸벅


내려올 때는 다 같이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남편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노곤노곤한 몸을 쉬게 했다. 만 원 버스였다. 늦게 탔으면 큰일 날 뻔. 팔걸이에 매달려 유령처럼 휘청거릴 뻔했다. 산을 오르는 중간중간 어머님이 계속 나에게 힘들지 않은지, 몸은 괜찮은지 물어보셨는데, 그때마다 "저 괜찮아요!" 혹은 "안 힘들어요! 충분해요!"를 외쳐대던 나는 하산하면서부터 에너지가 급속도로 소진돼 결국 감기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남한산성 오르고 감기몸살이라니요. 집에 와서 소파에 드러누워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체력을 좀 길러야겠다.' 헬스장 가서 매일 30분 이상 걷기로 결심, 또 결심. 역시 잘 놀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다. 다음 등산은 체력을 좀 기른 다음에 시도해야지. 몸은 좀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소풍가는 기분을 만끽했던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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