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이 소중해지자, 남의 시간도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한인교회에서 드럼 반주를 맡고 있었다. 일요일 예배 전 토요일 오후 3시에 연습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4시에 도착했다.
잘 보이고 싶었던 여성 친구가 있었다. 데이트 약속을 했고, 그 친구의 준비가 1시간 넘게 걸렸다. 그래서 4시 도착.
asteya-pratiṣṭhāyāṃ sarva-ratna-upasthānam
"아스테야에 확고히 자리 잡으면, 모든 보물이 다가온다." — 요가수트라 2.37
지금 이 장면을 아스테야(훔치지 않는 것)의 눈으로 다시 보면, 흥미로운 것이 보인다.
그 친구는 내 시간을 가져갔다. 그리고 나는 찬양팀원들의 시간을 훔쳤다. 그들은 3시부터 나를 기다렸다. 드럼 반주 없이 연습을 시작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시간의 훔침은 이렇게 이어진다. 누군가 내 시간을 가져가면, 나는 다른 누군가의 시간을 가져가게 된다.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은 쉽다. 대부분의 사람은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을 훔치는 것은?
약속 시간에 늦는 것. 회의에서 혼자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 "잠깐만"이라고 하고 30분을 가져가는 것. 수업 시간이 끝났는데 10분 더 끌어가는 것.
우리는 매일 시간을 훔치고, 시간을 빼앗기며 살고 있다. 다만 그것을 '훔침'이라고 인식하지 않을 뿐이다.
전환이 온 것은, 삶의 목적이 뚜렷해지면서였다.
하고 싶은 게 분명해질수록, 내 시간과 에너지가 더욱 소중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이 시작되었다. 내 시간이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내 안에 사이렌이 켜졌다.
그리고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내 시간이 소중해지자, 남의 시간도 소중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덕적으로 결심한 게 아니다. 내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니, 상대의 시간도 같은 무게를 갖고 있음이 저절로 보였다.
간단한 예를 들겠다.
"우리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이 한마디에 무엇이 빠져 있는가? 목적이 없다. 상대는 갈까 말까 고민해야 한다. 판단의 근거가 없으니, 이 요청 자체가 상대의 에너지를 가져간다.
나는 목적을 더한다.
"요즘 너의 안부가 궁금하고, 직접 이야기 듣고 싶어. 7시에 1시간 정도 시간 괜찮아? 바쁘면 다음 주도 좋아."
목적, 소요 시간, 거절의 여지. 이 세 가지가 들어가면, 상대는 자기 시간을 지킬 수 있다.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양쪽 다 느끼게 된다.
이번 주, 누군가에게 시간을 요청할 때 세 가지를 포함해 보시라.
왜 만나고 싶은지. 얼마나 걸리는지. 그리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
이것만으로도, 당신이 훔치고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빼앗기고 있던 것들까지도.
매트 밖 수련 — 매주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