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힘을 다해 펜대를 부여잡고
젊었을 무렵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한 껏 참고
있는 힘을 다해서
그는
펜대에 매달려
위로 위로 기어올랐지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 에리히 케스트너 <올라가기> 中 -
엄마의 글을 찾으러 갔다가 내가 모르는 엄마를 찾아버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엄마가 갓 결혼했을 때의 일기장을 발견한 것이다. 28살의 엄마, 엄마이기 전의 엄마,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흔적이었다. 같이 일기장을 찾아 읽던 61살의 엄마는 "나도 이런 게 집에 있는 줄 몰랐다."며 대책 없이 눈시울부터 붉혔다.
황달처럼 빛이 바랜 스케치북에는 어딘가 불안한 새댁의 글씨가 빼곡했다. 엄마가 결혼하고 딱 두 달째 되던 날부터 쓰인 이야기들. 여기도 시가 한 가득이다. 헤르만 헤세, 노천명, 신달자, 김초혜 등의 문장을 필사한 것도 한 가득. 종종 영화나 책에 대한 감상을 적기도, 신문을 오려 두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은 결혼 생활에서 느끼는 막막함, 외할머니(엄마의 엄마)에 대한 감정의 변덕, 고향과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일기다. 엄마는 지금 나와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시대가 달랐기에 풍족하지 못하고 고향은 멀고 자유는 더 멀었을 것이다. 설레는 신혼일기가 다 무슨 소리.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하며 방황하는 새댁의 하소연이 가득하다. 서툰 자신을 자책하고, 답답한 심정을 끝내 말 못 해 펜대를 잡고 말았을 어린 엄마의 모습이 짠했다.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지면서도, 61살의 엄마 모습이 점점점 희미해져 과거의 엄마와 그리고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서글프리만치 아무도 없는 이 낮은 어쩌면 방랑인지도 모르겠다."
"늘 구석구석에 널려 있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들춰내어 닦고 닦고 산다."
엄마와 눈물 콧물을 빼며 새벽 한 시까지 바래진 기억을 읽었다. 올해 환갑을 맞은 엄마는 일기 속의 엄마보다 한결 평온해 보였다. 보물 같은 글자들을 더 읽고 싶어서 노트들을 바리 싸들고 집으로 왔다. 한 자, 한 자 책처럼 엄마를 읽으며 나는 갑갑도 했고 슬프기도 했으며 웃음도 터졌다.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따뜻한 사랑보다는 주워 담은 사랑 속에 컸다."라고 쓴 엄마는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리며 "늘상 중립을 터득하고자 애썼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사방의 눈치를 보며 한 줌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썼을 아이.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집중되는 애정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그 탓에 엄마는 결혼 초기 한 사람으로부터 오롯이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것에 긴장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다락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속내를 정리하고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근면 성실한 남편을 위로했던 엄마. 스스로를 "유난히 감상적이고 미성숙했다."라고 표현했던 어린 엄마는 조금씩 안정적인 사랑을 느끼며 변해갔다. 그리고 첫아기(드디어 내가 등장한다)를 갖게 된 엄마. 나를 낳기 두 달쯤 전, 엄마의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엄마라는 존재. 땀나는 얘기다 아직은. 내 빈 속을 메우기 힘든 것처럼, 나도 그 아이의 가슴을 비게 만들지는 않을까."
본인의 유년시절을 나에게 투영하게 될까봐 염려했나보다. 지금의 나처럼 어렸던 엄마는 한 사람을 낳고 길러내는 '엄마'라는 자리가 겁이 났던 것이다. 엄마가 되는 일이 너무도 무겁고 두렵게만 느껴지는 지금의 나는 이 글을 읽고 어쩐지 격려를 받은 기분이었다. 내 어린 엄마도 이토록 잘 해냈으니까, 나도 언젠가 엄마가 된다면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겠지.
사실 엄마의 일기에서 어떤 글들은 '괜히 봤구나' 싶기도 했다. 굳이 몰라도 됐을 엄마의 너무 깊은 속내를 알게 돼버린 것 같아서. 엄마의 외로움과 슬픔이 내가 다독여주기에는 이미 심연처럼 돼버린 것 같아서. 그러나 한편으로는 34살 먹은 지금의 나라서 엄마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다음에 가면 엄마를 꼭 안아줘야지. 그리고 생각했다. 나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조금 낯선 기분이다.
"각별함이 없이 자라온 환경 탓으로 많은 부분의 소중함을 갖지 못했던 어린 시절보다 나는 지금 조금 더 확실한 사랑을 배우며 살아간다."
안절부절못하던 새댁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조금씩 평안함을 찾아나간 것으로 보인다. 내가 태어난 이후 엄마의 일기장은 훨씬 더 사랑 충만한 글자들로 채워졌다. 엄마 배를 아프게 하며 태어난 내가, 그나마 그때라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 듯해 내심 보람을 느꼈다. 아기를 매개로 더욱 단단해진 부부의 모습, 아기의 말간 얼굴에 누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까 걱정하는 어미, 떼쓰고 화를 내는 멋모르는 아기. 엄마는 아기가 잠든 한낮에 글을 쓰고 울다 잠든 한밤중에 글을 썼다.
"사랑할 이를 갖고 사랑 줄 아가를 갖고 나는 새 봄을 맞고 있다. 꽃내음보다도 더 좋은 아가의 살 냄새 속으로 자꾸만 숨고 싶다. 방긋방긋 웃어주는 아가의 입 속은 얼마나 예쁘던가. 오늘 아침 무슨 일로 화가 난 아가는 내가 싫은 모양이다. 가장 싫은 목소리로 계속 울어대는 아가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져 꼭 껴안고 웃어본다. 엄마에게 화를 낼 줄 알다니 기쁜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새댁은 엄마가 됐고 글을 끝끝내 부여잡으며 지금의 엄마가 됐다. 아슬아슬 글이나마 부여잡고 말이다. 나는 엄마의 시간이 글을 써낸 건 줄 알았는데, 엄마는 글로 시간을 써내며 살았다. 나 같은 청춘을 앓고 있었던 한 사람. 엄마의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을 이제는 조금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도 복잡하고 가녀린 마음으로 어떻게 이 세월을 살아왔는지. 꾹 다문 입술 뒤로 이렇게나 깊은 감정들을 삭여왔는지. 이 한 편의 글에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엄마의 글씨들이 지난 며칠간 나를 어지럽혔다.
젊었을 무렵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한 껏 참고 있는 힘을 다해서 펜대에 매달려 위로 위로 기어올랐던 나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