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글 속에서만 '저답게'
"누가 그러더라. 세상에서 제일 폭력적인 말이 남자답다, 여자답다, 엄마답다, 의사답다, 학생답다, 이런 말들이라고. 그냥 다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서 서툰 건데, 그래서 안쓰러운 건데, 그래서 실수 좀 해도 되는 건데......"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중 영진의 대사
시 쓰는 엄마와 엄마의 글에 대해 적었던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나의 엄마에게 상당히 '낯선 기분'을 느끼곤 했다. 처음으로 엄마를 진지하고 깊숙하게 들여다본 나는 마치 외딴 방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생경한 인물을 대면하고 있는 듯했다.
처음 이 글의 주제를 정했던 이유는 그저 시 쓰는 엄마가 좋아서였다. 그리고 엄마의 시가 원색적이면서도 쉽게 읽히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져서, 진심으로 누군가 함께 읽고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행간을 곱씹어 읽으며, 또 엄마와 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결정적으로 엄마의 오래된 일기장을 들추어보며, 나는 그전에 알지 못했던 다른 사람을 만난 듯했다. 나는 엄마의 일부가 아닌 전체와 처음으로 맞닥뜨렸다.
엄마의 오래된 일기장은 마치 프리퀄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먼 훗날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그 애가 20대의 나를 알게 됐을 때 이런 기분일까. 그 애는 엄마가 아닌 '나'를 다정하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 엄마가 아니었을 때의 엄마는 기실 완벽한 타인이기도 하면서도 완벽하게 엄마와 연결돼 있었다. 책과 글쓰기와 클래식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모두 엄마가 엄마이기 이전부터 그대로였다. 방통대 진학과 시 공부도 모두 우연이라거나 즉흥적인 선언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엄마는 처음 살아보는 '엄마다운' 인생을 서툴지만 최선을 다해 산 뒤에야 비로소 '저다운' 삶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한 심경은 엄마가 문학회 첫 모임을 다녀온 후 남겼던 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랜 기다림 같은 길 하나 내고 온 오늘은 참 행복합니다. 너덜너덜한 길 위에서 흘린 피, 붉은 바다로 흘러갔습니다. 꽃씨 하나 심고 돌아온 밤입니다. 다시 시작된 나의 시간들이 어떤 형태로 달라져 갈는지요. 큰 강을 건너온 기분입니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나는 마음에 봄이 온 것 같습니다."
엄마는 마치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당연하기라도 한 듯, 환갑을 전환점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나가고 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이제 엄마로서보다는 한 사람으로서 응원하고 격려할 생각이다. 그리고 나 역시 어떤 형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더라도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나다움'을 기억하고 살겠다.
나처럼 길을 잃고 헤맸던 젊은 날의 엄마는 한 사람의 아내로, 두 딸의 엄마로, 때로는 화장품 공장의 여공으로, 구멍가게 주인장으로 뚜벅뚜벅 살아왔다. 뚜벅이 엄마는 졸음이 섬처럼 밀려왔을 텐데도 다락방에서, 새벽 달빛에서, 과자 진열대 앞에서 늘 써내려 갔다. 누가 언제 읽어줄지 모르는 글들을 숨죽여 썼다. 엄마는 오로지 글 속에서만 '엄마답게'가 아닌 '저답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