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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와차 Nov 12. 2019

엄마의 문장들

서툴지만 선명한, 대담하고 가지런한

"그래, 춘천에는 언제 려오니."

"그럼 이만, 엄마 총총."

엄마만의 정겨운 글자들이 있다. 다른 맞춤법들은 잘 지키면서도 꼭 '내려오다'는 '네려오다'로 틀리는 엄마. 예전에 표준어 규정이 바뀌어서 헷갈리는 거라고 우기는데, 아무리 검색해봐도 아닌 듯하다. '엄마 총총'은 맞벌이로 일하던 시절 집에 남겨진 나와 동생에게 쓴 메모에서 시작된 줄 알았더니, 내가 기어 다닐 때 적은 일기에서도 발견됐다. 나름 시그니처 같은 것이었나.


오랜만에 엄마의 노트를 기웃거렸다. 좋아하는, 엄마의 언어들이 무더기다. 엄마를 닮은 문장들, 그리고 나, 나의 문장들. 생각해보는 시간이 따뜻하다.  


엄마의 습작 노트는 빼곡하다. 시를 쓰기 위한 문장들이 대부분이지만 읽기에 따라 편지나 일기 같고, 어쩌면 기도문 같기도 하다. 정제되기 이전의 그 문장들을 좋아한다. 가만히 읽어보면 엄마의 문장은 성긴 데가 있다. 행간이 치밀하지 못하고 듬성듬성한데, 그 사이사이에 엄마의 시선이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미완의 문장들. 생생한 재료들이다.


"하늘을 종잡을 수가 없다

구름을 낳다 사라진 지가 벌써 두 시간쯤

별 생각이 다 든다

노란 버스가 돌다가 돌다가 구석에서 잠들었다

가늘어진 노래를 부르는 매미가 안쓰럽다

강 위로 황새 한 마리 려 앉는다

생각 없는 차들이 울려대는 소음이 길다

아침을 접은 노인들이 하나, 둘 평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 무덤에 무성히 자랐을 풀들이 보고 싶다

하늘은 창문도 열지 않고

차 소리에 놀란 황새의 목이 순식간에 길어진다

사람들은 은유처럼 걷다가 돌다가 사라졌다

별이 뜨기를 기다려야 하나

닳은 신발 굽을 바꿔야 할 텐데

살그머니 내 창을 두드리는 

햇살이 웃고 있다"


엄마의 시선을 타고 움직이는 문장들이 그날의 아침을 짐작게 해 준다. 성기게 이동하는 소실점, 그 점과 점 사이를 옮기는 동안 엄마의 마음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시시한 서사에도 나는 잠시 엄마가 돼 본다.


엄마의 문장은 또 다정하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둘 다 아닌 그 무엇이든,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갔을 모습이 훤하다. 얼음통에서 일렁이는 살얼음에게도, 젖은 채 널려 있는 설거지 더미에게도, 탄 내를 품고 나란히 누워 있는 붕어빵들에게도, 엄마는 말을 건네어 본다. 밤하늘에 뜬 달에게도, 14층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들에게도, 어느 새벽의 두툼한 어둠에게도, 엄마는 찬찬히 눈길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려봤을 것이다.     


"얼음통에서 얼음을 꺼내다 

덜 언 얼음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눈 맞았다 

그래 그래 더는 흔들지 않을게 

그렁그렁한 눈물이 흔들린다

아직 덜 자란 것들의 불안"


"붕어빵은 집을 나온 채 

허름한 천막 안에서 겨울을 날 예정"


그렇지만 내가 엄마의 문장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코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순간의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쨍한 단어들을 꽂아 넣은 듯한 묘미가 있다. 낯선 조합들이 가득한데 날 선 것은 없다. 감정의 동요를 애꿎게 부추기지도 않는다. 그렇게, 누구나 겪어봤음직한 일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어내는 그 선명함이 나는 가장 좋다. 아직은 서툰 문장들이지만, 결코 노련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고 쉽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침형 저녁형 혈관형, 약들이 난립한 집으로

무채색 엄마가 귀환했다 

소환당했던 엄마가 겹겹의 주름 속으로 

달팽이가 되어서" 


"소음을 과다 복용한 일요일

지친 귀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저녁이 말수를 줄이고

식탁에서는 되도록 

밑간을 친 말들이 오고 간다

편협한 반찬을 먹는다

소음도 멀고 잠도 저녁

개미처럼 무리 지어 엎드린

언어들의 몸통을 확대하는 시간"


박력 있고 대담한 단어들이 엄마의 문장 안에서 가지런하다. 그런 마디 마디에서 나는 엄마의 표정을 떠올리고, 지친 하루에 공감하고, 고독함을 짐짓 아는 체해본다.  


"엄마는 어떤 문장을 쓰고 싶어?"


"남들이 거쳐가지 않은 문장, 거칠고 독창적인 문장. 그런데 무엇보다 '잘 숨긴 문장'을 쓰고 싶어. 잘 숨겨서 현실을 적당히 가리는, 그렇다고 너무 숨겨서 해석에 애를 먹지도 않게 하는 거. 숨기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고 제일 어려워. 계속 써야지. 더 열심히 계속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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