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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와차 Nov 16. 2019

빈 이젤에 걸려 있던 딸의 응원

나는 늘 엄마의 재능을 응원했다

"면아(미연아), 너 어릴 때 엄마한테 이젤을 사다 줬었니?"

"응, 기억 안 나?"

"엄마는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늦었지만 정말 고마워."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을까. 여름이 절정을 향해 무르익어 가던 무렵, 엄마의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선물을 결정해 둔 터였다. 내 방 책꽂이에는 한 점의 드로잉이 걸려 있었는데, 아기 때의 내 모습을 엄마가 그린 것이었다. 기저귀를 차고 엎드려 자고 있는 내 모습이 썩 예쁘다거나 대단히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유독 그 그림이 좋아 아끼곤 했다. 연필로 슥슥 그려진 투박한 손맛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엄마가 지긋이 날 바라보며 그림 그렸을 장면을 떠올리니 몽글몽글 사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예전처럼 엄마가 다시 그림을 그린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했다.


그때는 엄마가 늘상 글을 쓰고 있는 줄도 몰랐다. 매일 밖에서 일하고 돌아와 집안일까지 하느라 지친 엄마에게 취미 같은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안일을 도와주는 게 최고였을 텐데 말이다. 그런 실용적인 아이디어보다는 나름의 드라마틱한 선물 계획을 세우고 본인이 더 신이 났었다. 엄마가 우리를 키우느라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못했을 테니 내가 다시 엄마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리라는 당찬 계획이었다. 당시는 1990년대. '그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밥 로스(Bob Ross)' 아저씨였다. EBS의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밥 아저씨는 늘 곧게 서 있는 이젤 앞에 앉아서 마법처럼 그림을 그리며 "참 쉽죠?"라고 반문했었다.

그래, 엄마에게 이젤을 선물해주자


철없던 나는 이젤만 있으면 엄마도 마법처럼 그림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제일 친했던 친구 한 명을 대동한 나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엄마와 가본 기억을 더듬어 '알파 문구센터'를 찾아갔다. 돈이 어디서 났고 얼마를 들고 갔을까. 무작정 이젤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어쩌면 휴대할 수 있는 더 좋은 이젤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값 때문이었는지 밥 아저씨의 것과 같은 이젤을 사고 싶었기 때문인지, 나는 접히지도 않고 나무로 만들어진 키 크고 무거운 이젤을 냅다 사버렸다. 그 후의 기억은 단 두 개다. 친구와 나는 버스에서 그 이젤을 거의 머리에 이고 왔다는 것과, 엄마의 생일날 이후 그 이젤은 베란다 창고에 처박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 내 상상 속에서 이젤을 받은 엄마는 눈물 흘리며 감격했어야 했는데, 목이 길어 슬픈 사슴 같던 이젤은 창고에도 겨우 들어가 다른 물건을 넣고 꺼낼 때마다 눈칫밥만 먹어야 했다. 그 뒤로는 모른다. 아마도 이사를 가면서 누군가에게 줬거나 버려졌겠지.


작은 가슴에 나름의 생채기가 됐던 그 이젤을, 엄마는 심지어 기억조차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욕심과 만족 때문이기도 하니까. 어쩌다 얘기가 나왔는지 동생을 통해 옛날 얘기를 듣게 된 엄마는 작년엔가 내게 불쑥 "고마웠다"라고 말했다.


"그 이젤이 네가 사다 준 거였구나. 세상에 그 무거운 걸, 어렸던 네가. 그때는 생업에 치여서 쓸 시간이 없었어 미안해. 무슨 마음으로 네가 그걸 사다 줬을까......"


그저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림 그리고 책 읽는 엄마가 좋았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의 재능을 응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지난한 삶이지만, 그 어느 모퉁이에서라도 이젤을 활짝 펴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록달록 그려내기를 응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가 그림 그리기가 아닌 글 쓰는 일에 더욱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고뇌하는 작가를 상상하며 개다리소반이나 끈 달린 안경이나 만년필 같은 것을 선물했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이젤보다는 콤팩트했을 것인데.


빈 이젤에 걸려 있었던 건 결코 엄마가 그림 그리기를 바랐던 나의 마음이 아니다. 엄마가 엄마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것을 해내길 바랐던 마음이다. 엄마는 이젤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런 나의 마음만은 전해졌다는 듯, 언제나 글 속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행하며 살았다. 그렇다면 다 된 거다. 이젤은 충분히 쓰인 것이다.


이제는 시를 쓰는 엄마. 시라는 캔버스에서 엄마는 복숭아도 그리고 한낮의 태양도 그리고 엄마의 엄마도 그린다. 긴 세월 동안 엄마가 놓지 않고 지켜온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딸인 나로서도 참으로 부럽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즐거움이 다만 휘발되지 않고 시간에 비례해 쌓이며 원숙한 글을 남긴다는 것 또한 멋진 일이다. 나는 엄마의 재능을 동경한다. 이젤을 머리에 이고 지고 가져왔던 그때 그 마음처럼, 나는 늘 엄마의 재능을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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