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12월, 친구들과 남해안을 여행한 일이 있습니다. 막차로 서울역을 출발해 다음 날 기차에서 일출을 보며 순천역에 도착, 남해와 여수를 거쳐 완도로 갔다가 제주도행 여객선이 있길래 무작정 승선했습니다. 이게 계획에 없던 첫 제주도였습니다. 야영을 위해 제주항에서 가까운 함덕 해수욕장을 찾았습니다. 지금이야 번잡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당시 한겨울밤의 함덕은 불빛 하나 없이 적막한 벌판이었습니다. 다음날, 제주도에 왔으니 한라산에 올라야 한다는 데 의기투합해 어리목으로 갔습니다. 지금은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로만 백록담에 오를 수 있지만, 당시엔 어리목에서도 가능했습니다. 눈 덮힌 한라산을 장비 없이 운동화 신고 오르겠다는 무모한 패기가 몇 분 차이로 무산되었습니다. 10시 조금 지나 도착한 어리목에서는 입산 허용시간이 10시 이전이었습니다. 사정을 해봤지만, 면바지에 운동화 신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고도 규정을 어겨가며 입산시켜줄 관리인은 없었지요.
이후 백록담은 여러 차례 오르면서도 백록담으로 이어지지 않는 어리목과는 연이 없었습니다. 며칠 전,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찾았습니다. 혼자 하는 제주 여행은 늘 숙박 없이 새벽에 내려갔다 밤늦게 올라오는 당일 일정인데 처음으로 숙박을 포함한 일정을 잡았습니다. 어리목에서 돈내코 코스, 성판악에서 백록담 그리고 제주 바닷가를 마냥 걸을 계획이었지만, 날씨가 돕지 않네요.
37년 만에 다시 찾은 어리목에 옛 기억의 흔적은 없습니다. 어리목에서 숲길 오르는 내내 여우비가 내립니다. 아침 햇살은 투명한데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는 종종 장대비가 됩니다. 숲길 지나 능선으로 들어서자 비 맞고 오른 보상이 됩니다. 아쉽게도 백록담 분화구는 구름에 숨어 모습을 보여주지 않지만, 안개구름 사이로 스치듯 보이는 오름 풍경이 잘 조성된 정원같이 예쁩니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식사 중에 폭우가 내립니다. 이 빗속이라면 하산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다행히 식사가 끝날 무렵 비가 잦아듭니다.
다시 길을 재촉해 남벽분기점을 향합니다. 여전히 안개구름에 가려있던 백록담 분화구가 짧은 순간 그 장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현장에서 느꼈던 웅장함과 신비함의 아주 작은 부분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안개구름을 뜯어냈고, 의도치 않게 모습을 드러낸 분화구가 이내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 같은 신비함이 있습니다. 남벽분기점에서 돈내코 코스는 예상대로입니다. 기나긴 숲길, 이 코스에는 등산객이 거의 없어 산을 오로지한 호사를 누립니다.
서귀포에서 식사 겸 막걸리를 주문합니다. 식당에서 주문하면 나오는 제주도 막걸리는 제 경험으로는 한 종류이고 끔찍한 맛을 담고 있습니다. 왜 막걸리에 생유산균을 운운하는 건지! 제주도민이 늘 부럽다가도 이 막걸리에 다다르면 생각이 흔들립니다. 여행자를 위해, 누구보다 제주도민을 위해 새로운 막걸리를 개발하거나 도입해야 한다고 제주도지사께 강력히 건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