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세일 Dec 16. 2022

칼날이 가슴을 가르던 그 순간

역사 이야기

기원전 828년, 폭군 주여왕이 망명지에서 죽자 주나라 대신들은 14년 이어온 공화정치를 끝내고 태자 정을 왕위에 올립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주선왕은 대신들과 함께 좋은 정치를 펼칩니다. 나라가 안정되자 제후국들도 주를 종실(宗室)로 인정해 입조합니다. 재위 46년에 주선왕이 죽고 태자 궁생이 즉위해 주유왕이 됩니다. 주유왕은 방탕합니다. 대부 포향이 바른 소리를 하자 왕이 포향을 가둡니다. 아들이 아비를 구하기 위해 포사를 얻어 왕에게 바칩니다. 왕이 포향을 사면합니다.


포사에 진심인 왕은 모든 것을 포사와 함께하며 백복을 낳습니다. 왕의 정비는 신나라 신후(侯)의 딸 신후(后)였고 태자는 의구입니다. 왕은 포사를 정비로 삼고 백복에게 왕위를 전하고 싶습니다. 포사의 모함이 반복되자 왕은 신후와 의구를 폐하고 포사와 백복으로 대신합니다. 충신들은 떠나고 간신들만 남아 왕의 기행을 부추깁니다.


천하의 주인인 왕에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연인 포사의 웃음입니다. 포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지만 포사의 웃음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외침이 있을 때면 주나라는 봉화를 올려 제후국에 알리고 제후국은 군사를 동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간신 괵석보가 거짓 봉화를 올렸다고도 하고, 실수로 봉화가 올랐다고도 합니다. 어찌 됐든 봉화에 불이 붙었고 제후국은 의무를 수행합니다. 수많은 제후국의 군사들이 출정했다가 속은 것을 알고는 허망하게 돌아갑니다. 이 광경을 본 포사가 웃기 시작합니다. 순정파 왕은 포사의 웃음을 위해 자주 거짓 봉화를 올립니다. 왕의 숙부이자 정나라 군주인 정환공이 거짓 봉화의 위험을 경고하지만, 왕은 태평성대를 이유로 무시합니다. 거짓 봉화가 반복되자 제후국도 더 이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습니다.     


신후(侯)가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하고, 대로한 왕은 신을 공격하려 합니다. 신은 작은 제후국이어서 주를 이길 수 없습니다. 신나라 인근에 중국이 서쪽 오랑캐라 부르는 서융(西戎)의 일족인 견융(犬戎)이 있습니다. 신후는 주의 도읍인 호경에 있는 보물을 준다는 조건으로 견융을 참전시킵니다. 견융과 신의 군대가 호경으로 진격합니다. 주는 봉화를 올려 제후국에 위기를 알리지만 여러 차례 거짓 봉화에 속은 제후국은 출정하지 않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이솝이 쓴 ‘양치기 소년’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간신 괵석보가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나 몸은 두 동강 나고 더러운 이름만 후세에 전합니다.


수백 년 고도 호경이 견융의 말발굽에 파괴되고 백성들도 살육당합니다. 견융에 쫓겨 도망가는 어가를 정환공이 호위하며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견융의 화살에 쓰러집니다. 융주(戎主)가 왕과 백복의 목을 거둡니다. 이어 포사를 향한 칼끝이 거둔 건 그녀의 목이 아니라 몸입니다. 포사는 융주의 여자가 됩니다. 융주는 부고의 보물을 다 취하고도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견융의 군사력에 의지했던 신후는 견융을 통제할 힘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신후는 제후국에 구원을 요청해 호경을 되찾습니다. 융주는 포사를 돌볼 겨를 없이 도망가고 남겨진 포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기원전 771년, 태자 의구가 왕위에 올라 주평왕이 됩니다. 한 번 중원을 경험한 견융의 침략이 계속되자 왕은 즉위 1년 만에 호경(시안시 인근)을 버리고 320km 동쪽에 있는 옛날 주공 단이 개척했던 낙읍(뤄양시)으로 천도합니다. 주의 동천을 기점으로 이전을 서주, 이후를 동주라 합니다.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256년, 진(秦)나라에 멸망될 때까지 오백여 년 더 존재하는 동주는 패권을 잃고 상징적인 종실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하의 말희, 상의 달기와 함께 포사도 패권국 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이 됩니다.


이후에도 정비와 적자를 몰아내고 자신의 소생으로 왕위를 잇게 하려는 후비의 시도가 끝없이 반복됩니다. 포사의 끔찍한 결말이 교훈이 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이 싸움은 왕위를 놓고 벌이는 권력투쟁이 아니라, 죽이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생결단의 싸움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신후와 의구는 한 성질 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포사, 왕이 죽고 태자 의구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은 물론 아들 백복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겠지요. 결국 포사는 선택의 여지 없이 아들 백복을 왕으로 만드는 일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주유왕인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 일을 수행할 지혜도 의지도 없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나라도, 조강지처도, 왕위를 계승할 적자마저도 자리할 공간 없이 오직 포사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어찌하면 포사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그를 지배하는 유일한 화두였습니다.     

주유왕은 포사가 비단 찢는 소리를 좋아하자 매일 100필의 비단을 찢게 했고, 거짓 봉화의 아이디어 제공자인 괵석보에겐 천금의 상금을 내려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고사를 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웃음을 위해 나라를 들어 이벤트를 기획하던 순정파 주유왕은 결국 사랑하는 여인이 피워놓은 불꽃 속으로 사라집니다.


칼날이 가슴을 가르던 그 순간, 포사에 대한 그의 감정은 여전했을까요?

작가의 이전글 위징, 명재상의 계보를 잇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