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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Oct 29. 2020

ENDING

꿈을 꾸시나요?

소란한 밤이다. 경이가 앉아, 낭자한 피를 훔치고 있었다. 아, 내가 뉴스를 봤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그의 친구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충격이 뇌리에 깊게 남았던 것이다. 경이는 아무 수건이나 들고서 서툴게 사건 현장을 정리했다. 저래서는 꼼짝없이 붙잡힐 것이다. 고작 6학년짜리 아이가 사람을 죽이다니 끔찍한 일들 중에 가장 끔찍했다. 경이는 온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한숨을 내 쉰 나는 집을 나섰다. 이런 답답한 상황은 이제 그만 보고 싶었다. 집을 나가자마자, 이번에는 경이의 시체가 보였다. 그는 이제 친구에게 살해당한 열세 살 아이가 되어 복도에 누워있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가만히 선 채로 폭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경이는 참 많이도 죽었다. 내가 꿈을 많이 꿔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몇 번을 죽었다가 살아났다. 경이의 시체를 조심조심 피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너무나 피곤했다. 지하에 내리자마자 K의 자동차가 보였다. 창문이 쓱 내려가더니, K가 인사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조수석에 앉아, K를 찬찬히 뜯어봤다. K는 선글라스를 꼈다. 익숙한 그 얼굴이지만, 언제 적이 될지 알 수 없었다. K는 그런 내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힐끔 쳐다봤다. 안심이 됐다. 적어도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서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줄은 몰랐다. 내가 무슨 영화를 봤었나? 고층빌딩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땅이 쿵쿵 울렸다. 지진인 듯했다. K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냥 운전을 해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나도 놀라지 않았다. 지금껏 건물에 깔려 죽은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연재해로 죽지는 않았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지?"


"너는 대체 기억을 왜 못하는 거야?"


"미안. 정신이 없잖아."


K는 넘어지는 전봇대를 능숙하게 피하고는 말했다.


"영화보기로 했잖아. 마리하고, 원하고."


나는 핸드폰으로 모바일 티켓을 확인했다. 보고 싶던 액션 영화였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했다. 내가 친구들을 졸라서 다 같이 가는 중임을 상기했다. 마리와 원은 사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둘은 다투고 있는 중이었다. 둘이 참 다르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K도 웃겨 죽겠다는 듯 내 왼쪽 어깨를 연신 때려댔다.


"오늘 원이 내 동생 죽일 뻔했어."


차에 오르자마자 마리가 화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 마리의 막냇동생은 좀비에 물려서 좀비가 됐다. 우리는 늘 하던 것처럼 느리고 멍청한 좀비를 죽여대다가도, 마리의 동생이 보이면 피하기로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었다. 아마 동생은 좀비 중에 가장 오래 살아남는 좀비가 될지도 몰랐다. 나는 마리가 우리 몰래 동생을 지켜주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끼는 동생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마리도 가족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리와 원의 다툼은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구역을 한참 지나칠 때까지 계속됐다. 드디어 K가 폭발했다.


"한 번만 더 좀비 얘기하면, 당장 되돌아가서 마리 동생은 죽이고, 원은 좀비로 만들어버린다."


덕분에 SUV는 오분 정도는 침묵 속에 이동했다. 곧 거리에서 홀로 빛나는 황금색 영화관이 눈에 들어왔다. 지진 때문인지, 영화관 건물 옥상이 무너져 있었다. 마리가 입을 먼저 열었다.



"이건 무너진 거라기보다는..."


"위쪽이 날아갔네."


원이 중얼거리고, 앞장서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가 그 뒤를 따랐다. 내부도 천장에서 떨어진 돌덩이가 잔뜩이었다. 먼지가 날려서 연신 기침이 나왔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어왔다. 이런 흐름은 전에 많이 봤다. 뭔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닥에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많아서, 우리는 안내된 경로대로 갈 수 없었다.


"꼭 액션 영화를 예매했어야 했나? 나는 이것만으로 충분한데."


원의 말에 K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삼십 개 정도의 구멍을 뛰어넘어, 이층으로 가는 계단 앞에 다다랐다. K는 굽이 높은 워커를 신었기 때문에 가장 뒤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그의 발이 얼마나 아플지 상상이 됐다. 상영관은 칠층이었다.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원이 욕을 뱉었다. 엘리베이터 타자고 제안한 K도, 원의 무시무시한 욕설을 들어야 했다.  원의 말이 맞았다.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영화가 상영하긴 할까?"


마리가 나의 눈치를 보며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곧 칠층에 도착했다. 그곳까지 가는 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위험들의 구체적인 종류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 핸드폰을 잃어버린 곳은 악어가 적어도 열 마리는 기어 다니던, 오층이었을 것이다. 모바일 티켓도, 지갑도, 또 핸드폰 자체도, 내 핸드폰 안에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꼼짝없이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K와 원은 나를 엄청나게 놀렸고, 그들끼리 들어가 버렸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막상 그 뒤통수들을 보니 아무거나 던져서 맞추고 싶어 졌다. 마리만이 혼이 빠져나간 내 어깨를 슬쩍 밀었다.


"핸드폰 찾으러 가자."


"어차피 지금 찾아도 영화 못 보잖아."


"영화는 무슨 영화? 너 폰 찾아야지. 그냥 버릴 수 없잖아."


마리가 날 끌고, 다시 한층 한층 내려갔다.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정한 녀석.


"너는 영화 안 봐도 돼?"


죽은 악어를 뒤집으면서 마리에게 묻자,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냥 다음에 보려고."


핸드폰은 결국 찾지 못했다. 우리는 K와 원을 좀 기다리다가, 그냥 우리끼리 돌아가기로 했다. K의 차를 훔쳐 타자고 마리가 제안했다. 걸리면 K가 나를 죽일 것이었다.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너 혹시 날 줄 알아?"


"아니. 너 설마 날 줄 알아?"


마리가 놀라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조금 뿌듯해져서 어깨를 괜히 으쓱했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금방이잖아. 내가 너 손 잡고 날게."


"너 날 줄 아는 거, 왜 몰랐지?"


"K가 나는 거 싫어하잖아. 계속 같이 보니까 그렇지."


오층의 벽 끝에서 창문까지 질주해서 뛰어내렸다. 약간 몸이 뜨는 듯하더니 곧 뚝 떨어졌다. 오층 창문에서 마리가 고개를 쭉 빼고 박장대소했다. 몸이 살짝 뜬 채로 떨어져서 다치지는 않았다. 마리는 그냥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것도 오분밖에 안 걸렸다. 그는 다리가 무척 길기 때문이다. 마리는 나를 짧게 놀렸고, 나도 좀 웃었다. 그리고 K의 차를 훔쳐 타고 달렸다. 마리가 운전을 했다. 나는 면허가 없었다.


"그래도 안 다친 거 보니까, 조금은 날았나 보네."


"그만 말하라고 했잖아. 원래 적응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알았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마리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노래를 불렀다.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도 전혀 다른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하늘에 별이 많았다. 나는 문득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처음에도 알았던 것 같은데, 잠시 잊은 듯했다. 꿈이 아닌 곳에서 마리가 죽었는지 헷갈렸다. K와 원은 확실히 살아있는데, 마리가 확실하지 않았다. 내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자, 마리는 음악을 껐다.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마리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뭐 먹을지나 생각해봐."

 

우리는 밤의 소란스러움에 묻혀서 달렸다. 아침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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