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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Oct 15. 2020

질주

K를 떠올리는 전차 안에서

 이촌을 지난다. 며칠 동안 잠을 적게 잤더니 멍한 기분이 든다. 나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덜컹거리는 전철를 타고 K를 생각한다. 그에게는 손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막상 펜을 들기가 쉽지 않았다. 시도는 했다. 늘 시도는 한다. 아직도 그때의 편지들이 내게는 위로가 되니까. 글씨체가 살짝 바뀐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글도 안 써 버릇하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K를 생각하며

 

세상 살기가 지치는 일 투성이다. 조금 걷다가 고꾸라지고, 겨우 일어나 걸었는데, 어디에선가 비웃고, 그런 일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누군가 화려하게 저 멀리 날아가면, 그 모습은 서러울만치 선명하게 보인다. 발 딛고 있는 땅을 괜히 툭툭 쳐보고는, '결국에 이 밑으로 스며들어 죽는 삶이 아닐까' 하며,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 괜찮은 척 하지만 가끔은 두려워서 눈물이 난다. 들숨날숨을 반복하며 내일도, 그것의 내일도 살아낼 생각에, 나는 벌써 지치는 것 같다.

K가 울면서 전화했을 때 마음이 아팠다. 무기력과 우울과 자책이 얼마나 질기고 잔인한지, 또 그들끼리 얼마나 절친한지, 나도 알고 있기에. 그의 탓이 아닌 절망과 우울이 그에게 줄 상처가 두렵다. 어떤 사건이나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 감당해야 할 수많은 새벽들과 이야기들에 마음이 울렁거린다. 나는 차라리 그를 전혀 모른다고 하고 싶어 진다. 차라리 K를 누구보다 굳센 인간으로 믿고서, 그는 별로 아프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조금의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다. 내가 그의 우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그가 무쇠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K는 그거다. 단감. 단감 정도로 단단하고 물렁한 스물몇 살은 당연히 상처 나고 당연히 멍들어 버리고 당연히 아프다. 우리는 참 잘해도 세상이 두렵고, 조금 실수하면 스스로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바보 같은 내가 그런 건지 모두의 인생이 그런 건지는 영영 모를 테지만. 


최근 꿈에서 K를 찾아 헤매었다. 심장이 온몸에서 튀어 오르는 불안함에 세상을 뒤졌다. 결국 어떤 예쁜 무덤 앞에 다다랐을 때, 불안감은 소름 끼치는 두려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린 동생에게 관 안에 K가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아주 떨어져 서서, 부들부들 떨면서, 나는 볼 수가 없다고, 내가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하니, 동생은 땅을 파고 관을 열었다. 


"야, 스물한 살의 우리는 나이답게 힘들고, 우리답게 예쁠 수 있을까? 삶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고, 결국 우리만의 길을 찾아서 걷게 될까? 저 먼 날에 섰을 때, 스물한 살이 서럽고, 비참하고, 눈물 나게 아름다워서 꼭 한번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까?" 

 

꿈에서 동생은 관 안에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냥 보석이랑 꽃 같은 것들이 마냥 예쁘게 묻혀 있다고 했다. 나는 그게 꿈인 줄 모르고 다행스러움에 온 얼굴이 흠뻑 젖어라 울었다. 


쌀쌀한 바닷가에서 K와 만났다. 살아있는 K를 꽉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와 오토바이를 타고 온 세상을 질주했다. 바람이 우리를 그저 날려 보내는 것처럼 달렸다. 죽을 뻔했다. 근데 왜 그랬는지 죽을 뻔하고 죽을 뻔하고, 미치게 무서웠는데도 우리는 살아있는 채로 계속 달렸다. 그건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질주였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민망하고 멍한 기분으로 K를 생각했다. 나를 생각하고, 나의 친구들을 생각했다. 사자 같은 머리로, 아직도 얼굴이 축축한 채로.

 

우리는 단감 정도의 단단함에다가 길에는 돌부리가 치이게 많아서 끊임없이 넘어지고 아프다. 절망감에 부서질 것 같을 때마다 내가 그의 편이 되기를 바란다. 언제나 그가 나의 숨이 되듯이. 사실 K는 정말 괜찮은데, 내가 오지랖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 전철은 중앙 역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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