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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Oct 21. 2020

붉은 포식 나비

흰나비는 보호받아야 해

소란한 밤이다.

배 부근에 타오르는 액체가 느껴진다.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려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숨쉬었던거다. 이제는 죽는 거다. 나의 머리가 바닥에 닿아있는 것 같다. 넘어진 것 같지 않은데. 발소리가 우두두두 땅을 울리며 가까워진다.


나는 묵직한 종이봉투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묵직한 물건들이 좋았다. 배에 올려놓고 있으면 나를 중력에 꼭 잡아두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벼운 편도 아니기에 그 생각은 사실 좀 우스웠다. 어쨌든 종이봉투 속에는 일 년을 매달렸던 원고가 들어있었다. 기행문 열두 편과 시 여섯 편은 드디어 세상에 나올 참이었다. 기차에서 나는 불규칙한 소음이 오히려 편안했다. 남춘천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섰다. 창가 자리에서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을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저기..."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의 그는 터널의 어둠에서 태어난 괴물처럼 보였다. 그의 새하얀 머리칼은 목덜미에서 흘렀다. 얼굴에도 핏기가 돌지 않았다. 외투 또한 흰색이었다. 방금까지 겨울 속에 서 있다 막 여름에 도착한 사람인 것 같았다. 저절로 건너편의 사람들에게 눈이 갔다. 분명히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름이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더니 털뭉치를 내밀었다.


"제가 화장실이 급해서 그러는데, 잠시만 맡아주시겠습니까?"


"아, 네."


받아 든 것은 커다란 회색 토끼였다. 조금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배 부근이 더 묵직해졌다. 기차가 터널 출구에 가까워짐에 따라 창가에서 빛이 들어왔다. 빛은 그의 얼굴 위에도 비추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눈물길의 자국이 보였다. 빛을 받은 그는 전신이 하얗게 빛났는데, 그럴수록 더욱 초라해졌다. 그는 급히 뒤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어떤 예감이 들었다. 그는 원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쳐다봤다.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버리면 안돼요."


나의 말에 그는 울기 시작했다. 듣기 힘들 만큼 울었다. 나는 그를 옆에 앉히곤, 휴지를 몇 장 뽑아주었다. 그는 토끼를 끌어안고 온 몸을 들썩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연신 사과했다. 토끼한테 하는 사과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그냥 휴지를 계속 뽑아서 건네주었다. 그는 살기 힘들어서 토끼를 버리기로 한 걸까? 얼마 전부터 종종 뉴스에 나온 내용이었다. 많은 토끼들이 버려지고 있었다. 그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내가 질문하면 그가 짧게 답을 하는 식이었다. 그 중간중간에도 그는 사과를 했다. 토끼는 더 이상 떨지 않았고, 숨도 좀 크게 쉬는 것 같았다. 그 또한 춘천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더 우는 것이 버거워서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했다. 어쨌든 그는 점점 좋아졌다. 희미했지만  내 삼촌 이야기에 살짝 웃기도 했다. 차장이 남춘천역에 들어섰음을 알렸다. 갑자기 그는 벌떡 일어나서 내게 토끼를 건넸다.


"아까 앞 칸 사람한테 분유와 담요를 맡겼어요. 그걸 찾아와야 합니다."


"아, 내가 토끼를 맡아줄게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는 토끼에게서 따뜻한 여름 바람을 느꼈다. 늘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섬세하며, 도움이 되는 사람. 그는 두번 다시 토끼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기차는 곧 역에 도착했다. 물건을 맡긴 사람과 문제가 생긴 것인지, 그는 내가 내려야만 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역사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도 남춘천에서 내렸을 것이고, 이 자리는 눈에 잘 띄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아주 바쁘게 제 갈 길을 갔다. 나도 저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가장 보드라운 토끼를 안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토끼를 들여다보며, 그 작은 코를 건드렸다. 토끼는 눈을 깜박이며 꼬물거렸다. 종교는 없지만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 새하얀 그와 회색 토끼의 삶 앞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순간 실수로 토끼를 떨어트렸다. 세게 떨어진 것도 아닌데, 토끼는 미동도 없었다. 눈도 뜨지 않았다. 몇 차례 흔들어 보았지만 죽은 것이 확실했다. 정말이지 난감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일단 토끼를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구리에 든 원고가 안타깝게 부스럭거렸다. 일 년을 꼬박 준비한 건데, 실수 때문에 수포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 원래 그가 토끼를 버리려고 했다는 사실이 조금의 위로가 되었다. 조금의 고민 끝에, 토끼의 앞발부터 먹기 시작했다. 꽤 커다란 토끼였지만 아주 보드라웠기 때문에 목에 잘 넘어갔다. 사람들은 나를 힐끔힐끔 보며 피해서 지나갔지만 딱히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얼마 후 하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저 멀리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내 손에는 회색토끼의 보드라운 넓적다리가 들려있고, 그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분유통이 돌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얼른 토끼의 마지막 조각을 먹어치웠다. 당연히 미안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도 나눴고, 그의 토끼를 맡아주겠다는 약속도 했었으니, 진심으로 미안했다.

역 바깥을 향해 달렸다. 발이 가볍게 느껴졌고, 왠지 절대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무섭게 쫒아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몇 개 건널 동안 우리의 간격이 좁혀졌다. 열심히 달렸지만 원고가 꽤 무거웠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달렸다. 중앙광장 쪽으로 나왔을 때, 그가 넘어졌다. 나는 계속 달렸다. 다시 뒤를 돌아봤을 때, 그는 얼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에 상처가 났는지 그는 더듬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직도 나를 찾는 것이다. 내게는 토끼도 없는데! 이제 그에 대한 연민이 사라졌다. 그는 내가 보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광장 중앙에는 견학을 나온 고등학생 무리가 있었고, 나는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선생님이 말했다. 이상한 모자를 쓴 사람이었다.


"자, 얘들아. 이게 춘천에만 있는 흰나비야."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뒷걸음질 쳐서 홀린 듯이 나비를 쳐다봤다.


"우리는 흰나비를 보호해야 한단다."


명석한 학생 하나가 물었다.


"무엇으로부터요?"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곧 붉고 커다란 나비를 토했다. 학생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붉은 나비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총성과 함께 부서졌다. 그 다음, 하얀 손에 들린 총이 나를 겨눴다.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안쓰러운지 생각해 보려고 했다. 흰나비가 태양을 향해서 날아가고-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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