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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Oct 22. 2020

그에게 애인이 생겼노라고

소란한 밤이다. 동해의 바닷바람은 지나치게 쌀쌀하다. 나는 한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밤바다를 둘러 걷는다. 모래와 자갈이 투박한 샌들을 잡아당긴다. 나는 잠시 머리를 식히고 돌아가자고 생각한다. 이미 모두가 취했고, 나는 외로워 죽을 것만 같다. 파도소리가 점점 커진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진다. 저 멀리서 달빛을 한 몸에 받는 파라솔이 보인다. 파라솔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 나는 뒤돌기가 무서워서 앞으로만 걷는 사람이다. 작은 파라솔 밑에 아름다운 두 사람이 있다. 마음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파도 바로 앞에서 마리가 울고, 내가 사랑하는 그는 옆을 지킨다. 그의 얼굴도 괴로움으로 일그러진다. 나는 마리의 눈물보다, 그의 괴로운 얼굴이 더 슬프다. 곧이어 그들이 나를 발견한다. 나는 바보 같은 몸짓으로 그들에게 불청객이 된다. 점점 다가갈수록 나는 더욱 사라지고 싶지만 뒤돌아 걸을 자신이 없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표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는 날 볼 때, 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순간 이제껏 중 가장 커다란 파도가 밀려온다. 나는 바다 쪽으로 넘어진다. 옷이 다 젖는다. 온몸이 모래 투성이가 된다. 마리가 달려온다. 


"너 괜찮아?"


다정한 마리는 자신이 더러워지는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마리가 나의 오랜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견디기가 힘들다. 내가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도 다가온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나는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낸다. 그리고 크게 웃으려고 해 본다. 한심하고 더럽다고 생각할까?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리를 사랑해서 이 모든 상황이 역겨운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괜찮아. 방해해서 미안."


그와 눈이 마주친다. 곧 나는 죽고 싶어 진다. 


갑자기 아침이 밝았다.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아 나를 다독였다. 빌어먹을 꿈이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이었고, 내가 언제쯤 잠에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요즘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지 못한다. 어제는 아마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것 같다. 자꾸 소란스러운 꿈을 꾸는 것이 불안했다.     


방의 창문을 열자 바람이 들이쳤다. 회색의 텅 빈 하늘에 종이 상자 하나가 저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책상 위에 두었던 영수증과 종이들이 아무렇게나 날렸다.

나는 창틀에 기대어 밖을 내다봤다. 빗물이 튀었지만 괜찮았다. 밖에 나가서, 바람 한가운데 서 있는 상상을 했다. 아무도 없는 길에 서서, 거리의 끝을 쳐다보는 시선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그가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바람에 내가 사라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태풍은 정말로 누군가 죽이고는 한다. 


'하지만 정말 그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종이 상자가 하늘에 날리고, 고막을 찢는 바람소리가 울리고, 비가 정신없이 쏟아져 내릴 때, 거리의 끝에서 그가 걸어온다면 어떨까. 말이 안 되더라도,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믿을 만하더라도, 혹시나 내가 사랑하는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면 어떨까. 결국 내 앞에 다다른 사랑이, 나의 눈을 마주 보며, 날이 추우니 그만 들어가-하고 말한다면.'


결국 나는 나의 탓을 해야 했다. 날아가는 무언가에 그의 생각을 하는, 나를 역겨워해야 했다. 꿈과 다를 것이 없었다.

창문을 닫으니 갑작스러운 정적이었다. 나는 정적과 함께 울음을 꼭 삼켰다. 바람이 부끄러운 것들을 모두 날려버리면, 남는 것 역시도 부끄러움뿐 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할 바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나는 온 데 널려 있는 종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아는 선배가 말했다. 맥주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애인이 생겼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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