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즙 한 잔에 담긴 안심의 시간
저녁 공기가 마르고, 목이 조금 칼칼한 날이 있다.
식탁 위 과일 바구니에서 배 하나를 집어 든다.
칼끝이 껍질을 미끄러지며 낸 얇은 소리,
잘린 단면에 맺히는 맑은 물기.
첫 조각을 한입 베어 물면
사과와는 다른, 맑은 달콤이 먼저 혀에 닿는다.
어릴 적 겨울밤이 떠오른다.
기침이 길어지면 주방 작은 냄비에
배와 꿀을 넣고 조용히 데우던 시간.
김이 부엌창을 흐리게 하고,
컵 가장자리로 맑은 향이 먼저 올라왔다.
그 한 모금을 넘기고 나면
가슴 속 긴장이 조금 풀리곤 했다.
우리는 달콤함이 아니라 안심을 마셨다.
요즘은 늦은 회의가 끝난 밤,
편의점에서 배즙 파우치를 하나 집는다.
문 앞에서 잠깐 멈춰, 한 모금을 천천히.
목이 먼저 잠잠해지고
머릿속 빠른 생각들이 한 박자 늦춰진다.
단순한 한 잔이 하루의 속도를 낮춘다.
배를 깎아 접시에 돌려 놓으면
식탁 위 대화도 조금 맑아진다.
“오늘은 어땠어?” 같은 질문이
과한 설명 없이도 부드럽게 이어진다.
달콤하지만 끈적이지 않은 맛처럼
말도 짧고 맑게 흐른다.
문득, 이 한 조각이 오기까지의 한 해를 생각한다.
봄의 꽃, 여름의 햇살과 비,
가지치기와 솎아내기, 새벽의 수확.
보이지 않는 손들이 모아 준 결과를
우리는 몇 초 만에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조각 하나를 더 천천히 씹는다.
고마움을 오래 느끼기 위해 속도를 낮춘다.
마지막 조각을 반으로 나눠
옆 사람 접시에 조용히 올려 둔다.
오늘의 안심을 함께 나누자는 뜻으로.
잔에 남은 배즙을 한 번 더 넘기며 다짐한다.
내일의 말은 오늘의 배처럼
맑고 짧고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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