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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의 같은 단어'가 초래한 한일 갈등

오사카총영사 시절 이야기

by 오태규


일본 정부가 2019년 8월 2일 우리나라를 수출대상 우대국인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경제보복 조치를 취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즉각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바로 그날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비록 일본이 경제강국이지만 우리 경제에 피해를 입히려 든다면 우리 역시 맞대응할 수 있는 방안들을 가지고 있다"면서 "가해자인 일본이 적반하장으로 큰 소리 치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일본 매스컴들, 특히 텔레비전 방송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문 대통령을 헐뜯었다. '적반하장'이라는 단어를 "도둑놈 같으니라구"라는 일본식 해석으로 풀이하며 문 대통령이 일본을 아주 무례하게 비난했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나는 일본 현지에서 이것을 지켜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같은 단어라도 한일 양국 사이에 어감과 뜻이 다르므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적반하장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반성은커녕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때 쓰는 관용어다. 자주 쓰는 4자성어로 어감이 가볍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본에서처럼 심각할 정도로 무겁지도 않다. 일본에서 적반하장이란 말은 우리가 상상하는 범위를 넘는 아주 강한 어조의 비난어라고 한다. 한일 사이의 원할한 소통을 위해서는 단어를 잘 골라써야겠다고 새삼스레 생각했다.

둘째는 이런 차이를 악용하는 것이다. 나는 적반하장이란 단어를 문제 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들이 일본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뜻이 다른 것을 모른체하거나 일부러 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 일부 신문의 견식 있는 서울 특파원은 적반하장을 한국식의 뜻으로 풀이해 점잖게 전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봐도 일본의 매스컴 관계자들이 이 단어의 뜻과 뉘앙스가 한국과 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오해보다는 악용이 훨씬 사악하다는 걸 이때 생생하게 느꼈다.

한일 두 나라에는 공통의 단어가 많다. 특히 한자에서 유래한 명사는 대개 단어도 뜻도 같다고 보면 된다. 도서관, 학교 등등 일상에서 쓰는 단어는 거의 같은 뜻의 같은 단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단어도 가끔 있다. 이런 단어들이 오해 또는 악용의 재료가 된다.

2019년 5월16일자 <아사히신문> 석간 1면 머리기사로, 이와 관련한 아주 흥미 있는 기사가 났다. 한일 사이에 '다른 뜻의 같은 한자어'가 가끔 상대국의 여론을 자극하고 갈등을 불러오는 요인이 된다는 기사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팔방미인'이 여러가지 재주를 가지고 있는 뛰어난 사람의 뜻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누구에게라도 잘 보이려고 알랑대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인다. '애인'도 한국에서는 연인을 뜻하지만 일본에서는 불륜의 상대로 사용한다. '친일'도 대표적으로 뜻이 다른 단어다. 일본에서는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한국에서는 친일이 어떤 의미인지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나쁜 뜻이다. 이밖에도 찾으려 한다면 이런 단어를 훨씬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일 사이의 다른 뜻, 같은 단어'를 모두 쓸어모으면 책을 한 권 쓸 수 있는 분량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차이에서 오는 오해와 악용을 피하는 방법은 없을까.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상대방의 문화를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차이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모두 방지할 정도로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상대를 잘아는 전문가들이 중간에서 오해와 악용이 생기지 않도록 중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100명의 경찰이 있어도 1명의 도둑을 잡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전문가들이 노력해도 악용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막기 곤란하다.

나는 우리 쪽에서 오해와 악용을 방지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대통령의 삼일절, 광복절 연설은 일본에서도 매년 큰 주목을 받는다. 대통령 연설에서 오해나 악용의 소지가 있는 단어를 쓰면, 일본 쪽의 수용 여하에 따라 국가 또는 대통령 이미지가 크게 손상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대통령의 삼일절, 광복절 연설만이라도 사전에 우리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동시 일역본을 제공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예 입구에서부터 오해와 악용의 소지를 막자는 것이다. 나름대로 이런 뜻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행사 직전에야 한글 연설문이 나오는 실정이어서 일역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약간 이건 다르기도 하고 통하기도 하는 얘기이지만, 코로나 사태와 자연재해 탓으로 민단의 삼일절, 광복절 행사가 몇 차례 연기되어 열린 적이 있다. 일본에서 민단 주최의 삼일절, 광복절 행사는 남다른 의미가 있고, 오사카총영사관 관할에서는 한국과 같은 시간대에 행사를 하는 게 관례다. 그러다 보니까 대통령 연설을 한글로 대독할 수밖에 없다. 재일동포들의 한글말 실력은 대체로 쉬운 우리말로 일상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한글 연설을 즉석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 등으로 행사가 연기되면서, 다행스럽게도 일역 연설문을 준비할 수 있었고, 동포들도 대통령의 연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소통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소통을 잘하는 것은 어렵다. 더구나 쓰는 말이 다른 사람 사이의 소통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같은 한자문화권이라는 공통의 토대가 있기 때문에 소통하기 쉽다는 안이한 생각이 더욱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우리 쪽에서 오해와 악용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대안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일본을 상대로 한 정부의 공식 메시지부터 동시 일역본을 제공함으로써 오해나 악용을 막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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