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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거울'로 재해석한 동아시아 근대사

<동아시아 역사학 선언>

by 오태규

다루는 주제는 매우 묵직하다. 하지만 내용이 전혀 딱딱하지 않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여타의 책에 비해 술술 잘 읽힌다.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일이, 복잡한 문제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주제를 완전히 소화한 뒤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풀어내는 피 말리는 고투를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학자의 능력이라면, 후자는 글쟁이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통은 두 능력을 다 겸비하기 힘들다.


<동아시아 역사학 선언>(에피스테메, 2021년 10월)의 저자인 강상규 방송통신대 교수는 이 책에서 학자와 글쟁이의 능력을 모두 유감없이 과시한다.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아시아 근대사를 19세기 후반(아편전쟁에서 청일전쟁 직전까지), 20세기 전반(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 종결까지), 20세기 후반(일본의 패전에서 냉전의 종식까지), 21세기 초반(탈냉전에서 현재까지)의 네 시기로 나눠 솜씨 좋게 설명한다. 그는 '다중거울'과 '추체험'이라는 개념을 '안내견' 삼아 독자들을 동아시아 근대 속으로 안내한다. 두 개념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마처럼 얽혀 있는 동아시아 근대로의 여행이 매우 지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이었을 텐데, 좋은 안내견 덕에 흥미롭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다중 거울'은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거울의 총체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운전을 할 때 여러 종류의 거울을 적절하게 섞어 사용해야 안전운전을 할 수 있듯이, 동아시아 역사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한일관계라든가, 일본 또는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거울로만 비춰 보지 말고 여러 거울을 종합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추체험'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기 체험처럼 느낀다는 것이니 역지사지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려운 문제를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개념의 유용성'을 새삼 느꼈다.


그는 "'다중거울'과 '추체험'을 통해 동아시아 근대사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비판적이고 균형 있게 음미"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또 이 책을 보면서 상생과 지속 가능한 (동아시아의)미래를 위한 '생각의 근육', '삶의 근육', '지혜의 근육'이 생겨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책은 먼저 19세기 후반은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관계에 있는 동아시아가 서양의 충격을 받아 근대국가 질서 속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살핀다. 즉, 서양의 충격 속에서 한국, 일본, 중국의 각자의 처한 여건에 따라 근대국가 질서에 적응해 가는가는 추적한다. 20세기 전반은 청일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주도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시기로, '일본이 벌인 50년 전쟁'이라는 틀을 사용해 이 시기를 설명한다. 그동안 일본의 근대를 '메이지시대의 훌륭한 일본'과 '쇼와시대의 난폭한 일본'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시각이 주류를 이뤘는데, 강 교수는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 패전까지를 아울러 '50년 전쟁'이라는 거울로 연속적으로 봐야 당시의 일본과 동아시아를 총체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패전부터 냉전 해체까지인 20세기 후반은 제국 일본의 50년 전쟁이 끝나면서 생긴 공백을,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체제,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체제를 기반으로 한 일본의 경제우선주의, 양안관계로 상징되는 '두 개의 중국체제'가 채운 채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관계를 형성해 나간 것으로 설명한다. 특히, 한국전쟁을 계기로 쇠락했던 일본과 중국이 재부상하는 과정은 중일 두 나라 사이에 끼여 있는 한반도의 역사가 너무 무겁고 가혹하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냉전 해체 이후인 21세기 초반엔 정보혁명과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로 동아시아 차원에서 지속되던 '동아시아 전후체제'가 한계상황에 이른 징후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상생할 수 있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위한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지금 동아시아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있음을 상기하면서, 가재가 탈피를 할 때처럼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열쇠는 '유연한 사고'와 '모험 정신'이라고 말한다. 즉, 위기에서 탈피해 상생의 동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고착되어 있는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유연하고도 담대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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