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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Apr 03. 2022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제주 '4.3 사건' <화산도>

김석범, 재일동포, 이방근, 남승지

제주 4.3사건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이다. 동백꽃은 4.3사건의 희생자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 속으로 스러져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4.3 평화재단과 제주도, 4.3 70주년 기념사업회가 2018년 4.3사건 70주년을 기념해 동백꽃 배지를 만들어 배포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에서 4.3사건과 동백꽃의 관계가 더욱 대중화됐다. 나도 오사카총영사 재직 시절, 현지의 제주 4.3 희생자위령비건립위원회 관계자로부터 동백꽃 배지를 받아 찬 적이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제주 유세 때 옷깃에 배지를 달았길래 자세히 보니까 바로 동백꽃 배지였다. 


꽃 중에서 동백꽃이 4.3사건을 상징한다면, 문학에서는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과 이산하의 장편시 <한라산>이 4.3사건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국외까지 범위를 확대한다면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씨의 <화산도>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5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김석범씨는 부모의 고향이 제주이고 제주에서 산 적이 있지만 직접 4.3사건을 겪지는 않았다. 재일동포 문인 중에서 소설의 김석범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김시종 시인이 직접 4.3사건을 겪은 것과 대조된다. 4.3을 직접 경험한 김시종 시인이 수십년 동안 4.3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면, 김석범씨는 좀 더 이른 시기부터 4.3에 관한 소설을 썼다. 김씨는 1957년 4.3과 관련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 <간수 박서방>과 <까마귀의 죽음>을 잇달아 문예지에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그는 4.3사건으로 오사카로 피난온 친척 등의 얘기를 듣고 4.3과 관련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이후 4.3은 평생의 문학 주제로 자리 잡았다.


<화산도>(보고사, 김석범 지음/김환기 김학동 옮김, 2015년 10월)는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다. 1976년에 쓰기 시작해 1997년에 완성됐다. 일본어 기준으로 원고지 1만2천매, 전 7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보고사에서 번역한 글을 기준으로는 매수가 더욱 늘어, 무려 2만2천매 전 12권이나 된다. 이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은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나는 오사카총영사로 가기 직전인 2018년 3월에 한글 번역본을 구입해, 부임 직전까지 완독했다. 김석범씨가 오사카 출신이고 오사카에는 일본에서도 제주 출신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부임 준비 필독서라고 생각했다. 현지에 가면 김석범씨도 만날 수 있을 터이고, 이 책을 화제로 현지의 동포들과 얘기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부임했을 때는 김씨가 시즈오카로 거처를 옮겨 이임 때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김시종 시인은 오사카 인근에 살고 있어 비교적 자주 볼 기회가 있었다. 다만 책에서 나온 오사카와 고베의 얘기는 부임 뒤 활동을 하면서 큰 도움이 됐다.


<화산도>는 분량에 비해 다루는 기간은 매우 짧다. 4.3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1948년 2월 말부터 무장대가 궤멸되는 1949년까지 15개월 정도다. 그래서 무장투쟁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다루기보다 이방근, 남승지, 이유원(이방근의 동생) 등 등장인물을 축으로 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추적하고 파장을 다루는 것에 집중한다. 일본의 식민지, 본토와 제주의 관계, 유교적인 상하관계, 2차대전 이후의 냉전과 남북대립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잡한 현실을 파헤친다.


김씨는 '한국어판 <화산도> 출간에 즈음하여'라는 글에서 "<화산도>는 1948년에 터진 4.3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해방공간의 역사적 현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으며, 4.3에 표출되어 있는 '한국현대사의 맹점, 맹점인 동시에 분단조국의 집중적인 모순'인 4.3의 진상 추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4.3의 진상 추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토벌군 사령관의 추모비는 버젓하게 세워져 있는데, 빨치산 대장의 위패조차 아직 4.3기념관에 안치돼 있지 않은 현실을 개탄한다. 


그가 2015년 제주 4.3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분단의 원흉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박근혜 정권은 이 발언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2016년 그의 한국 입국을 불허한 바 있다. 그는 아직도 무국적인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데, 조선적은 정부가 여행허가서를 내주지 않으면 국내에 들어올 수 없다. 조선적의 입국을 여행증명서 발급을 통해 억제하는 조치는 2017년 문재인 정부의 등장과 함께 없어졌지만,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섰으니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 조선적 재일동포들에게는 이 부분이 지금 초미의 관심사일 것이다.


일제 말에 사상범으로 체포됐다가 전향한 부잣집 아들 이방근은 <화산도> 마지막 부분에서 친척 형이자 경찰인 한대용을 직접 총살한다. 그리고 게릴라이자 동생(이유원)의 연인인 남승지를 일본으로 밀항시킨 뒤 자살한다. 이것으로 대하소설 <화산도>는 끝난다. 김씨는 "'허무와 혁명-혁명에 의한 허무의 초극'이라는 내 소설 테마의 집대성으로서의 <화산도>는 혁명의 패배라는 결말로 끝이 났다"(1997년 소설 완결 뒤 <아사히신문> 인터뷰)고 밝혔지만, 그는 아직도 포기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화산도> 완성 뒤에도 2006년에 <땅밑의 태양>을,  2020년 <바다의 밑바닥으로부터>라는 후속작을 썼다. 모두 일본에 망명한 남승지와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 이유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다. 이들 소설은 <화산도>까지 합쳐 <화산도>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땅밑의 태양>은 읽지 못했지만, <바다 밑바닥으로부터>는 마침 내가 재임 중에 <세계> 잡지에 연재되고 있어 모두 읽었다. <화산도>는 한글 완역이 됐지만, 나머지 두 작품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이 되지 않았다. 3년 뒤면 김씨가 100세가 되는 만큼 그 전까지 3부작 완역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는 <화산도> 등의 작품에 관해 "내가 조국의 '남'이나 '북'의 어느 한 쪽 땅에 있었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작품들이다. 원한의 땅, 조국 상실, 망명의 유랑민, 디아스포라의 존재, 그 삶의 터인 일본이 아니었으면 <화산도>도 태어나지 못했을 작품이다. 가혹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바다 밑바닥으로부터>은 일본에 밀항해 살고 있는 남승지가 4.3사건의 박해를 피해 대마도(쓰시마)에 밀항해온 여성 게릴라 2명의 데리고 오사카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것은 <화산도>에서 이방근이 일본에 망명하는 남승지에게 유언처럼 남긴 "돼지가 되더라도 살아 남으라"는 말의 실천이자, 살아 있는 한 4.3의 진상을 추궁하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작가의 결의가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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