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친일>, 삼일절 기념사, 불편함, 윤석열, 식민지근대화론
윤석열 대통령의 2023년 삼일절 104돌 기념사는, 앞으로 이 나라가 계속되는 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나는 윤 대통령의 이날 기념사를 보고 세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 1022자에 불과한 양의 빈약함에 놀랐고, 둘째 역사인식의 허접함에 놀랐고, 일제의 침략주의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을 보고 세 번째로 놀랐다. 기념사를 듣자마자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에 <오마이뉴스>와 <민들레>에 이런 내용을 담은 기고를 했다.
나는 세 가지 중에서도 일제 식민지배를 보는 윤 대통령의 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연설문에 담긴 그의 역사 인식은 일제의 식민사관, 최근 한국에서 세를 얻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등 일본 우익들의 수정주의 역사관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 등의 말을 했다. 삼일운동의 원인이 됐던 일본의 식민지배, 침략주의를 욕하지 않고 우리의 준비 부족으로 나라를 잃었다는 점만 강조했다. 더구나 삼일절 기념사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감정을 섞어 말하면 '친일파 대통령', '매국, 매족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 내용에 분기탱천하고 있는 와중에, 손에 잡은 책이 <우리 안의 친일>(역사비평사, 조형근 지음, 2022년 10월)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왜구 척결론'도 함께 비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저류에 깔려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왜구 척격론의 입장에서 윤 대통령의 식민지근대화론에 쏠린 듯한 인식을 마구 비판하고 있는 차에, 왜구 척격론도 함께 비판 받아야 한다고 하니 찬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느 역사관이든 현실을 100%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니,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또 저자인 조형근씨는 한국 대학과 지식생산 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면서 안온한 학자(한림대 교수)의 길을 스스로 접고 '길거리의 학자'를 선택한 사람이다. 그러니 진영의 눈치를 보지 않고 두루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위치와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신문사라는 조직의 일원에서 벗어나 보니 그 신문사를 포함한 언론계 전반의 문제가 눈에 더욱 잘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식민지근대화론과 왜구척결론을 5 대 5의 비중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논지를 나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역사 해석에서 '우리는 선, 당신은 악'이라는 선명한 선긋기가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며 역사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촉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그는 2장(식민지근대화론 넘어서기)에서, 일제 시대의 쌀 증산 정책을 통계만을 중시해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낙성대학파의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주장을, 당시의 정치, 법 제도 상황을 들어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서문과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5장으로 되어 있다. 1장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반중민족주의가 제국 일본의 만주 점령과 함께 시작됐고, 이것이 해방 뒤 제대로 성찰되지 않은 채 동아시아 대부분을 한민족 기원의 나라로 주장하는 최근 '재야역사학'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3장에서는 학생 시절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실력양성의 길로 방향을 튼 의사들의 얘기를 통해, 불평등한 세상의 윗자리에 가서 그 힘으로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것이 갖는 한계와 모순을 지적한다. 사회 개혁을 위해 정치인의 길로 뛰어들었으나 기존의 정치인과 다름 없는 길을 가고 있는 '86세대' 정치인들이 곱씹으며 들어야 할 말이다.
4장(프랑스와 독일의 과거사 청산)에서는 흔히 우리나라에서 과거사 청산의 모범 으로 꼽히는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를 다루면서, 과거사 청산의 복잡함과 어려움을 지적한다. 프랑스, 독일 두 나라가 과거사 청산에 성공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성공의 신화'를 만들어 청산을 회피하고 미화한 면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다. 그러면서 5장으로 넘어가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대하는 일반사람들의 역사적 책임을 논한다. 당시 창씨개명이 강제는 아니었지만 안 하면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상황 속에서 일반 사람들이 가졌을 고뇌와 윤리적 고민이,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얘기한다.
저자는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어떤 패턴이나 법칙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자기 삶을 무게 달아보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매듭을 짓고 있다.
"역사는 국가의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민주화되어야 하지만, 어떤 집단이나 세력 - 그것이 국가든 민중이든 - 에게도 최종 해석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한판승이 아닌 끝없는 논쟁의 장 그 자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공유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피가 두텁지는 않지만, 매우 묵중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