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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Feb 24. 2021

책에도 인연이 있다


어제 늦은 저녁, 무슨 책을 읽을지 서가를 뒤적였다. 여러 책에 시선을 옮기다 맨 오른쪽 서가 보라색 책이 눈에 띄었다.


'밤의 도서관'


작년에 구입했는데 당시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아 보관만 하던 책이다. 무심코 어느 페이지를 펼쳤고 그때부터 새벽녘까지 작가가 안내하는 역사 속 책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참 좋은 책을 만났다는 만족감감돌았다.

이렇게 묵은 책 중 생각지도 못한 기쁨을 안겨주는 책이 있다. 김영하 작가는 한 프로그램에서 '책은 사놓은 것 중에 읽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 적이 있는데 책 욕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독서가를 위한 변론 같아서 내심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었다.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며 예전에 비해 수집욕이 줄었지만 여전히 양서를 향한 끊임없는 소장욕을 떨쳐내기 힘들다. 사놓고 완독 하지 못한 책이 매년 생긴다. 옅은 자책감을 안고 서가를 훑어볼 때가 많은데 간밤에 만난 책이 위안이 되어주었다. 책도 나와 만나는 인연의 때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당장 읽히지 않아도 언젠가는 딱 마주친다는 믿음이 차올랐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의 불교용어로 딱 맞는 시기에 이 책이 내게 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마침 새로이 정리한 책장에 자리한 위치, 어제의 가라앉은 기분, 세계로 빠져들기 적당했던 조명의 각도까지. 시기와 공간, 내면의 상태가 어우러진 결과였던 셈.

Photo by Olga Tutunaru on Unsplash

책의 인연은 실로 다양하다. 먼저 책이 다른 책으로 인도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밤의 도서관』은 보르헤스를 언급한 어느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전적인 영향으로 어느 날 시각을 상실한 보르헤스는 어둠 속에 살면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모집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 서점에서 일했던 청년이 채용되었다. 4년 간 보르헤스와 인연을 이어간 그 청년은 훗날 작가이자 번역가로 성장했고 현재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라는 이야기.  드라마틱한 서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밤의 도서관』의 저자인 알베르토 망구엘이다. 책이 이어주는 책은 풍부하다. 윤동주가 존경한 인물이 정지용이라는 해설 한 줄이 시집 『향수』 들게 했다, 공지영의 에세이 속에 언급된, 매일 아침 면도를 하며 몸을 정돈했던 나치 수용소 속 의사가 뇌리에 박혀 그의 저서인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르렀다.


누구를 만나 어떤 대화를 하느냐에 따라 책이 결정되기도 한다. 사람이 이어주는 책의 파도는 생각지도 못한 바다로 나아진다. 4년 동안 15개의 독서모임을 거치며 수백 명의 사람과 만났다. 한 달에 한 권,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책을 만난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멤버들이 추천하는 책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나의 취향에만 매몰되기 쉬운 좁은 시야가 확장된다. 서로가 서로를 확장시키는 힘은 몰랐던 분야를 탐험하는 길을 내어주고 한 사람의 가치관과 생각을 발견하는 힌트가 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책의 길로 안내하기 마련. 느슨한 취향의 연결은 SNS를 통해서도 이어진다. 북스타그램으로 맺어진 인연은 또 다른 발견의 기쁨을 건넨다. 자신이 번역한 책을 주기적으로 리그램하는 번역가 이웃을 통해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을 알았다. 만족감이 물씬 느껴지는 어느 이웃의 피드를  후 『사라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를 들였다. 여름이 되면 애서가들의 게시물에 으레 등장하는『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았다. 세 권의 책은 2019년 인상 깊은 책 Top 10에 꼽을 만큼 마음에 남는 책이 되었다. 나 역시 좋았던 책을 조심스레 독서모임 멤버에게 언급하거나 토론책으로 선정한다.『시옷의 세계』, 『시와 산책』은 호평으로 돌아온 책이라 뿌듯했다. 결이 비슷한 사람이 이어준 서적이 인생책으로 남기도 하니 호시탐탐 주변인의 책을 매의 눈으로 살필 수밖에. 


방문한 장소 또한 책과의 만남의 장이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책과 마주친 우연의 현장이다. 몇 년 전 새로운 동네에 이사 온 후 도서관을 찾았다. 그때 처음으로 만난 책이 유홍준의『안목』이었고 일제 시기 스러질 뻔한 우리의 예술품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현인의 존재를 알았다. 서양 미술에 쏠려 있던 편중된 사고를 우리네 예술 돌리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곤도 마리에의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은 미니멀 라이프에 발을 들이게 만든 삶의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집 근처 카페에서 작가를 발견한 적도 있다. 에디터는 보통 인터뷰 기사를 쓸 때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 적절한 균형을 맞추려 문체를 세심하게 다듬는다.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주관성에 무게가 실리면 독자의 몰입을 방해한다.

인터뷰이가 너무 좋아도 문장으로 감쌀 때가 있다. 이런 심리를 알기에 기사의 톤을 보면 에디터의 속내를 알아차리곤 한다.

그런데 어느 여름 가끔 들르는 카페의 소파에서 에디터의 사심이 넘치는 글을 만났다. '오호~ 정말 좋아하나 보다. 이 정도 팬심으로 인터뷰 기사를 쓰는 것도 드문데..'. 이 에디터가 얼마나 작가를  사랑하는지 느껴졌다. 넘치는 애정을 꾹꾹 눌러보려 애썼지만 더 이상은 못 내치겠다 싶은지 고스란히 심경이 전해져 왔다. '정세랑' 작가였다.

다음 날부터 보건교사 안은영』을 시작으로 그녀의 저서를 차례로 읽어나갔다. 기사에서 드러난 사심의 연유가 끄덕여졌다.

그날 한가한 시간이라 바로 제품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십여 곳의 동네 카페 중 다른 곳에 들렀더라면? 아마 한동안 작가를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워낙 유명해져서 언젠가만났을 테지만  시기가 한참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모든 우연의 접점을 거치며 책과 내가 이어진다. 그 시각, 그 장소, 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의 총체이다.   여정을 뚫고 내게 온 책의 면면이 새삼 귀히 보인다.

한편 아직 만나지 못한 미지의 우연을 고대하는 것도 삶의 기쁨일 테다. 살아갈 동안 예고 없이 나타날 무수한 책의 행렬이라니. 필시 끝없는 기쁨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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