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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영 Feb 27. 2020

연극 메리제인, 사정없는 인생

자, 이게 내 진짜 인생
2019. 12. 26. 캐스팅보드


남자들의 일자리와 월급이 훨씬 많은 이 세상에서, 특히나 그게 두드러지게 보이는 업계가 있다. 바로 공연계다. 그러나 안팎으로 부는 페미니즘 바람에, 최근 공연계도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 긍정적인 변화 속에서, 아주 반가운 공연이 있었다. 연출진도, 배우들도 모두 여성인 공연. 연극 '메리제인'이다. 한국 초연작인 연극 메리제인은 2019년 12월부터 2020년 1월까지,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홍익대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진행되었다.


여성 연출진이 만든 여성 배우들만 나오는 공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이 공연을 찾아갈 이유가 되었다. 너무나 부족한 여성 서사의 연극들 속에, 메리제인은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뇌성마비 아들을 가진 엄마, 메리제인의 이야기이다. 전남편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났고, 메리제인은 아이를 돌보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밝고 명랑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와 연대하는 8명의 여성들이 나온다.



자기야, 자기가 왜 미안해


사실 나는, 주변에 병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없어 실제로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 그게 맞기도 하고. 다 같은 평범한 인간인데 뭘 어떻게 하겠나. 그렇지만 이 연극을 보고, 어렴풋이 알게 되어서 정말 고마웠다. 그걸 가장 크게 깨닫게 된 장면이 아멜리아와 메리제인이 911을 부르는 씬이었다.


메리제인의 집에 방문한 셰리의 조카 아멜리아는,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킨 메리제인의 아들 알렉스를 위해 911에 전화를 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메리제인이 전화기를 건네받는다.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침착하게 설명을 한 메리제인이 전화를 끊고 난 후, 아멜리아가 펑펑 울며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런 아멜리아에게 메리제인이 자기야, 자기가 왜 미안해.라고 하는데, 그 순간 그 말이 나에게 너무 크게 다가왔다. 씁쓸하고, 미안하고, 그런 상황이 너무 익숙한 메리제인이 안쓰럽고. 그런데 안쓰럽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고, 그걸 다 견디고 있는 메리제인이 대단하고.


극의 초반부터,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 계속 내가 울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내 삶을 꿋꿋이 살아가는 메리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데,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보이는 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이 이 작품이 원하던 관객들의 반응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뇌성마비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의 이야기. 자칫하면 신파로 풀어낼 수 있는 소재인데, 전혀 부담스러운 모성애나 일부러 눈물 쏟게 하는 포인트를 넣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깊숙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우현주 연출의 말대로,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 작품이다. 과하지 않고 잔잔하게 풀어낸 인물들의 모습이, 나의 일상을 돌아보게 해 준다.



누군가는 아무 사정도 없이 살아가요


연극 메리제인은 아파트 관리인, 간호사, 대학생, 의사, 종교인 등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메리제인은 아픈 아들 때문에 힘들지만 본인을 아껴주는 친구들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또 브라이안처럼 본인과 같은 처지의 여성에게 지지를 보내고, 아멜리아처럼 자신의 아픔이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오히려 위로를 건넨다. 이렇게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보다 보면, 메리제인이 놓인 비극적인 상황도 다 잊게 되고, 모든 것이 그저 다 내 일상처럼 느껴지고, 내 옆에 있는 평범한 누군가의 인생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병원에서, 메리제인은 자신처럼 아이의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옆 침대의 보호자 차야와 이야기를 나눈다. 농담과 슬픔이 섞인 대화 속에서, 차야는 '누군가는 아무 사정도 없이 살아간다'라고 얘기한다. 이 작품을 보며 두 번째로 내 속에 크게 박힌 말이다. 다들 사정이 있지만, 나도 사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그저 흘러갈 뿐이다. 굳이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렇게 이유를 달지 않아도. 사실 우리는 다 아무 사정없이 살아간다. 허탈한 비관론자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인생이 꼭 극적인 요소 때문에 흘러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렇게 흘러가는 인생을, 나는 객석에 가만히 앉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었다. 



금붕어를 좋아해요


알렉스와 같은 수업을 듣는 헤일리라는 아이는, 하루 종일 빙글빙글 도는 덕에 어머니가 발레복을 입혀주었다고 한다. 그런 소소한 표현들이, 잔잔한 웃음을 짓게 하는 설정들이, 이 작품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알렉스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메리제인은 알렉스가 표현하는 것을 모두 알아듣는다. 알렉스는 눈송이를 좋아하고, 또 금붕어를 좋아한다.


알렉스가 좋아하는 금붕어는 결국 암컷이었을까, 수컷이었을까. 알렉스는 세 번째 수술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메리제인에게 진짜 세상은 어떤 삶이었을까. 마지막에 보여준 영상처럼, 눈 결정같이 가까이 놓인 하나하나의 상황들을 밟고 가다가, 눈이 쌓이는 것처럼 그 모든 아픔이 쌓이고, 결국 녹아내려 고드름이 생기고,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극의 전체적인 이야기가 너무 현실적이라, 보여주지 않은 작품 이후의 메리제인의 삶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현실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픔을 감동을 위한 도구로 쓰지 않는 작품. 아름다움과 고통이 공존하는 연극 메리제인을, 한번 더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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