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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작가 Jan 16. 2021

가족이라는 관계의 거리

3-1. 지나고 보니 선물 같은 시간

나는 신혼 때부터 엄마 집에서 3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다. 버스로는 5,6 정거장 정도 된다.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지만 엄마가 아프고 나서 나는 왠지 엄마 곁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때 살던 동네가 참 편안하고 좋긴 했다. 나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그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내게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공원도 많아 아이들과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도 좋았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 곁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아빠도 무척이나 원했다. 이사할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쩌다 아주 좋은 조건으로 집을 옮기게 되었다. 아빠의 옆 동이다. 아빠는 우리가 이사를 와서 너무나 좋아하셨다. 안 그래도 엄마의 병으로 마음이 무거우셨을 텐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딸이 옆 동에 오니 얼마나 좋으셨을까. 그때는 우리 집 둘째가 돌이 조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엄마는 그때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곧 그 시간이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사를 오면 모든 게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엄마를 위한 한 마음으로 이사를 추진했는데, 막상 이사를 오고 보니 아빠와의 관계로 인한 어려움이 커졌다.


아빠는 사람을 몹시 좋아하시는 분이다. 늘 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이는 걸 좋아하고, 자녀들도 한 가족만 만나지 않고 우리 삼 남매의 모든 가족이 다 같이 모이기를 원하신다. 이사를 오니 아빠는 거의 매일같이 우리 집에 오셨다. 요리를 잘하는 엄마와, 자주 사람들을 초대하는 걸 좋아하는 아빠와 함께 사람이 북적이던 친정에서 자란 나는 아빠가 퇴근해 오시면 발 빠르게 음식을 만들었다. 밤낮으로 아이를 돌보느라 몸이 지쳐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이사 오기 전 우리 아이들은 7시 반~8시면 잠들었었다. 약간은 강박적일 정도로 나는 아이들의 수면습관을 잡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저녁이 되면 나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이고 형광등은 켜지 않았다. 전구색의 주방등 하나만 켜서 어둑한 분위기에서 밤이 되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목욕을 시키고 책을 한 권 읽어주고 재웠다. 7시면 이미 우리 아이들은 잘 분위기였다. 당연히 저녁 약속은 잘 잡지 않았다. 덕분에 둘째도 업어 재우긴 했지만 밤잠은 잘 자는 편이었다.     


이사를 오니 아빠는 6~7시쯤 저녁을 드시고 술도 한잔 하셨다. 저녁식사 자리는 2~3시간 정도 이어졌다. 아이를 재워야 한다고 어둑하게 있으면 어떻게 이렇게 어둡게 사냐고, 너는 참 유난스럽게 애를 키운다고 한소리 하셨다. 


“9시, 10시에 자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게 유난 떨지 않아도 다 잘 큰다!!”


이제는 많이 큰 아이들이 당연스레 10시쯤 자는데, 언제부터 아이들이 10시에 자기 시작했지 하고 곱씹어본 적이 있었다. 큰 아이가 크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사를 오면서부터 9시, 10시로 점점 늦춰지게 된 것을 깨달았다. 이 외에도 예상치 못한 일들은 많이 일어났다. 내가 생각한 대로 삶을 살고 싶었던 나의 모든 것이 깨어지고 있었다.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늦게도 알았다.     


내 삶이 부모님께 투명하게 보이는 것도 너무나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내 모습 하나하나가 잔소리 거리였고 부족했다. 난 원래 좀 게으르고, 하고 싶은 일에는 열정적이지만 매일 부지런하게 깔끔하게 사는 것은 잘 못 한다. 나 스스로도 자신감이 떨어졌다. 내가 잘 못 하는 걸 가장 잘 아는 건 나다. 딸이 멋지게 잘 살았으면 하고 바라셨을 거다. 남편에게 잘하고 시부모님께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면서 내 일도 잘 해내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셨을 거다. 부모라면 당연히 바랄 수 있는 일인데,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부모님께 힘든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실까 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실망하실까 봐. 나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가 커서일까. 그것을 충족시키고 싶은 나의 욕심 때문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자녀를 위한 너무 많은 기대와 사랑과 관심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는 내 삶을 살고, 너는 너의 삶을 살게 두는 게 서로를 위해 좋다. 조금 더 바란다면,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퇴직을 앞둔데다 엄마에게는 병이 오고 있어 아빠가 생각하던 노년이 사라졌다 생각하셨다. 헛헛한 마음에 산책을 해도 우리 집 앞으로 오시고, 저녁 시간에도 불만 켜있으면 들어오셨다. 아무 때고 연락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고, 하루의 스케줄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다 보니 나의 사생활이 없어졌다.      

어느 날, 아이들을 재우고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띡띡띡 띠로리로


아버지      “안녕 안녕~!! 내가 밖에서 보니 네가 외롭게 혼자 핸드폰을 보고 있길래 내가 왔다!”

남편          “아, 안녕하세요..”

나               “..........”

아빠          “어서 들어와!!”

엄마           “얘들도 쉬어야지 왜 여길 와..”

아빠           “왜, 어서 들어와! 여기 앉자!!”     


나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빠는 아마도 과일도 내오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걸 생각했을지 모른다. 우리 집은 1층인데, 밤에 산책을 하다가 창문을 열은 틈으로 내가 혼자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걸 보고 들어오셨단다. 잠시 앉아계시다가 어서 집에 가자는 엄마의 말에 일어서셨다. 


부모님이 나가시고 나서, 처음으로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내 집인지, 장인어른 집인지 모르겠어.”     


미안하고, 속상했다. 




이사를 오고 처음에는 참 좋았다. 바쁘고 힘들기도 했지만 부모님과 가까워져서 좋기도 했다. 일 년 후쯤 큰오빠네 가족도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아빠와 비슷하게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정신없이 즐겁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다. 뭔가 힘들었다. 많이 힘들었다. 서로를 위한다는 일념 하에 소위 말해 오버하는 거다. 주로 내가 그랬다. 우리는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 자식 사이에도. 친구나 형제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서로 간에 간격을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지를 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리적으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최근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거리를 조절할 수 있었다. 사실 거리보다 더 중요한 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문제일지 모른다. 가족이기에 더 속마음을 나누기 어려웠다. 서로를 사랑하고 잘 지내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불만이 생겨도 건강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 시간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다행히 오빠들과 새언니들, 나의 남편 모두가 부모님과 서로를 위한다는 사랑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지금까지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감사한 마음이다. 


엄마를 위해 다시 가까운 거리로 모인 우리는 어린 시절의 한 가족에서 각자의 가정으로 변화된 관계의 거리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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