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ress del rio - Logroño
또레스 델 리오 - 로그로뇨
고요한 새벽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벌써 떠날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서고 있었다. 나는 아직 눈만 뜬 채 침대에 누워있다. 뜨거웠던 지난밤의 일들이 플래시백(Flashback)처럼 떠오른다. 끄응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부은 몸과 다리는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전보다 조금 익숙하게 배낭을 들고 중정에서 짐을 정리한다. 선선한 바람과 쏟아지는 별들을 보니 정신이 조금 든다.
숙소를 나오자마자 나는 철부지가 되어 메그에게 어젯밤 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내가 왜 화가 났었고, 맨발로 뛰쳐나갔는지. 어떻게 그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무례할 수 있는 건지 믿을 수가 없다며 모두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우리는 마을을 저만치 벗어나 있었다. 조명을 받으며 작게 반짝이는 마을이 예뻐서 사진에 담았다.
오늘은 더욱 아침 해가 반갑다. 어제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름다운 하늘이 태연하게 열린다. 그 광경이 황홀해 잠시 빠져들었다.
"키레!"
나란히 옆에 선 메그가 외쳤다. 나도 키레! 하고 따라 말했다.
"아름답다는 뜻이야. 한국말로는 뭐라고 해?"
"한국말로는 아름답다!"
"아루므답따?!"
"응! 아름답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서로의 언어를 크게 외쳐보았다. 그리고 잠시 하늘을 보다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다시 길을 걸어간다. 마음 맞는 동행을 까미노에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4K급 아름다운 선율
작은 교회 옆으로 녹색 텐트가 보였다. 숙소가 마땅치 않을 땐 길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는 순례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텐트 상태가 멀쩡하고 깨끗한 걸 보니 방치된 것이 아니라 순례자의 것이 맞지 않을까? 밤새 잠은 잘 잤을까? 겨우 아침에 잠든 것은 아닐까? 그 옆을 지나갈 땐 나도 모르게 발소리가 작아졌다.
오늘은 중간에 마을이 하나밖에 없다고 해서 조금 걱정을 했다. 하지만 역시 기대하지 않은 곳에 숨어있는 까미노 위의 "팝업 바"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먹음직한 과일들 사이에 바나나 하나와 제로콕을 사서 테이블에 앉는다. 가방 속에 있던 달달한 빵조각도 하나 입에 넣으며 메그와 오늘 도착지 로그로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로그로뇨는 팜플로나만큼 큰 도시라서 또 한 번 기대가 된다. 특히 이곳은 타파스 거리가 유명하고 맛집도 많다고 하니 오늘은 오랜만에 와인을 몇 잔 마셔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제 많이 걸어서 오늘 20km 정도만 걸으면 로그로뇨에 도착한다. 빨리 가서 로그로뇨 타파스 거리를 헤맬 생각을 하니 뱃속이 바이킹 탄 것처럼 몹시 간질간질하다.
팝업 바를 지나고 산속을 걷는데.. 어, 내가 잘못 들었나?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걸어갈수록 선명해지는 음악 소리. 최고급 스피커를 켜둔 것처럼 청량하고 맑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때때로 까미노는 회한과 생각으로 가득한 메마른 침묵의 길이 된다. 그러면 까미노는 잠시 무채색이 되곤 하는데 갑자기 음악을 만나면서 4K급 생생한 화질이 되는 것이다.
저 길 끝에 순례자들이 멈춰 서 있다. 저기구나, 이 영화 같은 장면의 출처가.
어디서 음악을 튼 것이라 생각하고 다가가는데 그곳에 한 사람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순례자들에게 이 아침에 더없이 어울리는 4K급 아름다운 선율을 선물해 주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어쩌면 저도 기타 연습할 곳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그래 차라리 그편이 좋겠다. 누가 누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도움이 되고 필요한 일이면 더 좋겠다.
비아나(Viana) 마을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메그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다. 나는 팝업바에서 먹은 것으로 충분해서 이번 마을은 그냥 지나쳐 가기로 했다. 대신 오래되어 보이는 유적지가 있어서 기웃거려 본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작은 뒷마당 같은 공간이 나왔다. 그늘이 늘어선 기둥 사이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이곳은 산 뻬드로 수도원 (Monasterio de San Pedro). 기둥과 성벽 곳곳이 깎이고 무너져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둔 것이 좀 신기했다. 남아있는 세월의 흔적들이 그런대로 느낌 있고 낭만적이었다.
우리사 사랑한 타파스
로그로뇨 공립 알베르게에 조금 일찍 도착하니 벌써 문 앞에 배낭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순례자들이 줄 서는 방법이다. 나도 얼른 배낭을 내려놓고 샌들로 갈아 신었다.
마당 곳곳에는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을 둘러본다. 테이블 한편에 한국인들이 모여있었다. 세종 선생님들이 계셨고 인사만 나눈 분, 처음 보는 한국 분도 있었다. 반가워서 그들 틈에 얼른 섞여 앉았다.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에피소드와 쌓여가는 순례길 노하우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스페인 음식에 대한 이야기, 로그로뇨 어느 마트에 가면 신라면을 판다더라, 한국 음식 뭐를 먹고 싶다 하는 그런 소소한 대화가 정겹다. 나는 메그라는 일본인 동행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했다.
공립 알베르게의 좋은 점은 워낙 시설이 크고 수용인원이 많다 보니 순례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지만 이전에 만났던 친구를 이곳에서 다시 만날 확률이 높으니 재회의 순간이 은근 기다려졌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장을 보러 나가려는데 이제 막 알베르게에 들어서는 소은을 만났다. 푸엔테 라 레이나 숙소에서 아시안들의 저녁상을 차릴 때 카레를 내주던 그녀다.
"언니 오늘 너어어어무 힘들었어요. 진짜 죽을 것 같아."
몸의 절반만 한 배낭을 메고 거의 울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는 소은이 나는 너어어어무 귀여워서 조카 사진을 찍듯이 사진을 찰칵 찍었다.
마트에서 돌아오니 이번엔 생장 친구 JM 언니가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와락! 껴안고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다. 물집이 너무 심하게 잡혀서 로그로뇨에서 이틀은 묵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하루 더 쉬어가면 그만큼 다시 만날 확률이 줄 텐데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언니의 발을 생각하면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말밖에는 해줄 수가 없다.
저녁이 되고 타파스 거리가 문을 열 시간이다. 메그와 나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어린이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바 오픈 30분 전부터 문 앞을 서성거렸다. 이곳은 "바 엔젤"이라는 곳인데 오직 양송이 타파스 한 메뉴만 있다. 워낙 한국인들에게 후기가 좋은 곳인데, 채식하는 메그에게 보여주니 아주 좋아했다.
두근두근 문 앞에서 기다렸으니 오늘 바 엔젤의 첫 번째 엔젤.. 아니 손님은 우리가 되겠다. 음하하하!
야무지게 로컬 와인과 양송이 타파스 두 개를 주문했다. 바는 금세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저 사람들은 아마 이 지역 단골들이겠지. 차려입은 청춘들, 한껏 멋을 낸 여행객들도 보인다. 우리는 맨얼굴에 행색이 조금(?) 초라한 (누가 봐도) 순례자지만 그들 속에서 잠시 여행자 기분을 내 보았다.
양송이 타파스는 그 명성 그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갈릭과 버터 그리고 이름 모를 허브 향. 쫍쪼름한 소금 간에 올리브유 맛이 나는 식감 좋은 양송이 타파스. 작은 새우와 바게트도 있어서 하나만 먹어도 포만감이 들 정도지만 한 접시만 먹을 순 없었다.
한국 까미노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로그로뇨 양송이 타파스 때문에 까미노 다시 간다는 농담을 했었는데, 그게 농담이 아니었구나! 진심이었어. (깨달음)
까미노만이 아니라 스페인에서 먹은 음식 중 단연코 베스트였다. 매우 간단한 요리에 심플한 맛인데 어쩜 이렇게 맛있을 수 있냐며 메그도 연신 스고이를 외쳤다. (까미노가 끝날 때까지 넘버원의 자리는 언제나 이 양송이 타파스였다.)
흥이 난 우리는 그 골목 다른 타파스바에도 들어갔다. 여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으니 이것저것 시켜서 즐겨볼 생각이었다. 친절하게도 타파스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먹고 싶은 걸 고를 수 있었다. 다들 너무 먹음직스러워 매우 행복한 고민이 되었던 순간이었다.
오늘 까미노 7일 중 가장 많이 와인을 마신 날이다. 무려 와인을 3잔이나 먹었다니. 와인 맛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스페인 와인은 한국에서 마시던 묵직한 와인들과는 다르게 목 넘김이 가볍고 음료처럼 술술 잘 들어간다. 뭐 이 정도면 이제 까미노 적응을 완전히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후후
맛있는 타파스와 스페인 로컬 와인을 마시다 보면 내가 순례자인 걸 잠시 잊게 돼... 지는 않고. ㅎㅎ; 내일은 30km 가까이 걸어야 하는 날이니 그만 마시고 돌아가자.
오랜만에 과음(?)하고 기분이 매우 좋은 우리는 볼이 발그레한 채 로그로뇨 거리를 좀 더 걸었다. 성당 앞 광장에는 하루를 마치고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성당 뒤편에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4인 합창단이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뉘엿거리고 거리 가로등이 톡 하고 소리를 내며 차례대로 켜졌다.
이것이 신호인 것처럼 우리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Bonus!
- 로그로뇨 알베르게 : Albergue de peregrinos de Logroño
- 로그로뇨 양송이 타파스 바 : 바 엔젤 (Bar Ángel)
- 로그로뇨 타바스 바 : Meson del Abue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