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 뜨겁고 평화롭기를

Estella - Toress del Rio

by OHz 오즈

에스테야 - 또레스 델 리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이라체 수도원의 "포도주의 샘"이다. 이라체 저장고에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각각 와인과 물이 나와서 순례자들이 따라 마실 수 있다.


지금이야 여러모로 풍족한 순례자들에게 간절하진 않을 테지만 오래전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이곳의 와인과 물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짐작해 본다. 운영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순례길의 오래된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노력이 대단하다.


포도주의 샘은 에스테야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서 거기까지 메그와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덕분에 혼자가 아닌 동행과 맞이하는 해돋이 풍경이 색다르다. 마지막에 조금 뒤처졌지만 너무 늦지는 않아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준비해 온 빈 병에 각자 한잔 정도의 와인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걷는 중에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정말 한 모금 맛만 보았다. 생각보다 시원하고 달달했다.

순례길 명소 중 하나라서 인지 금세 사람들이 많아졌다. 우리는 그곳에 오래 머무르진 않고 다시 까미노 길을 걸어간다.





작은 마을을 통과하는데 몇몇 집의 마당에 무궁화로 보이는 꽃들이 눈에 띈다. 오, 스페인에서 무궁화라니! 참 예쁘다. 이렇게 뜨거운 곳에서 활짝도 피었다.


무궁화 핀 마을을 지나자 이내 대평원이 펼쳐진 구간에 들어선다. 무슨 논과 밭인 지는 모르겠지만 수확이 끝난 9월이라 그런지 갈색 토지와 들판이 저 끝까지 펼쳐져 있다. 그 사이로 난 좁은 길에 배낭을 짊어진 순례자들이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아.. 이런 길을 이제 하염없이 걷겠구나.


기약 없이 뙤약볕을 걷다가 만난 마을 로스 아르꼬스(Los Arcos) 초입에 자판기와 작은 테이블이 다정하게 순례자를 맞이한다. 나는 더 갈 것 없이 이곳에서 콜라를 들이켠다. 어제 J의 말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목적지였을 마을이다.


마을의 성당 앞 멋진 야외 테이블에는 여유롭게 점심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압도적인 높이의 아치형 기둥 사이사이에 늘어진 순례자들도 심심하다. 저기 보이는 까스띠야 문 (Puerta de Castilla)을 통과하면 또 어떤 길을 만나게 될까.


점심시간이지만 입맛이 아직 돌지 않는다. 사실 순례길을 시작한 이후 제대로 점심을 먹은 적이 없다. 너무 힘들고 더워서 이기도 하지만 걷는 중간에 배불리 먹으면 힘이 나기보다 오히려 걷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화장실 위급상황이 두렵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점심은 대부분 건너뛰게 된다.


까미노 다녀온 분들의 말에 의하면 초반에 탄산만 들어가더라도 입맛은 놀랍게 곧 돌아온다고 한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그냥 몸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아마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내 몸이 본능적으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을 테니.





일은 저녁에 터졌다

처음으로 30km 가까이 걸었으니 내 다리 내놔라 절뚝 귀신이 다 되어 마을에 입성한다. 저기 누군가 빨래를 널다가 나를 보고 두 팔을 크게 흔든다.

메그다.


조용하고 소박한 산솔(San Sol)을 지나 조금 더 걸어서 도착한 곳, 또레스 델 리오는 정말로 작고 오래된 마을이다. 오늘 숙소는 다른 알베르게에 비해 조금 비싼 편이었는데 휴양지의 호텔같이 멋지고 깨끗했다. 중정에 수영장도 있어서 벌써 많은 이들이 수영과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중정 테이블에 앉았다. 맥주를 즐기는 으른들과는 달리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한다. 아까 체크인할 때 냉동고 속 아이스크림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오예를 외쳤는지 모른다. 알고 보니 메그도 아이스크림 귀신이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까미노에서 첫 아이스크림을 먹고 너무 행복해졌다.


일은 저녁에 터졌다.

저녁을 먹으러 호스텔에서 운영하는 식당으로 갔다.

4인용 테이블이 4개 정도 붙어있는 곳에 차례대로 앉으면 어김없이 시작된다. 어색한 시간이.

다행히 앞에는 함께 온 메그와 한국인 청년 J가 앉았고, 내 옆자리에는 비어있다가 잠시 후 처음 만나는 동양 여자가 와서 앉는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된 그녀는 홍콩에서 온 포라는 친구다.

처음 만났는데 이상하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메그가 그랬고 포가 그렇다. 포는 부모님의 걱정 때문에 까미노 일정을 미리 다 짜놓았고 숙소까지 전부 예약해서 걷는 중이라고 한다. 부모님의 걱정도 이해되었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그녀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동양인 4명이 모여있다. 두 명의 한국인과 일본인, 홍콩인까지 모였으니 영어로 대화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조금 신기했던 모양이다. 옆 테이블에서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던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얼굴은 벌써 궁금한 것이 아주 많은 표정이다.


"너네 영어 하니? 어디서 왔어?"


우리는 각자 한국, 일본, 홍콩 사람이라고 인사했다. 아저씨는 어디에서 왔어요?라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바로 다음 질문이 날아온다.


"(J의 핸드폰 그립톡을 가리키며) 이거는 뭐야?"

아 그거 핸드폰 이렇게 쓸 때 사용하는 거야.

"(나의 핸드폰 뒤에 붙어있는 보조배터리를 가리키며) 그럼 이건 뭐야?"

응? 이건 보조배터리인데 지금 충전 중이야.


궁금한 걸 물어볼 수는 있지만 무슨 동물원 원숭이 보듯 신기하게 우리를 쳐다보며 질문을 쏟아내니 조금 기분이 안 좋았다. 적어도 자기소개는 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질문.

"너네 한국인들은 걸을 때 왜 긴팔에 긴 바지에 얼굴도 가리고 걸어? 무슨 종교적인 이유야? 아님 국가에서 그렇게 하도록 뭔가 압력이 있나?"


까미노 6일째, 공교롭게도 거의 매일 어떤 식으로든 긴 팔을 입고 걷는 것에 대해 물어보는 이가 하루에 한 명 이상은 있었다. 처음에는 친절히 설명해 주다가 이제는 좀 피곤해졌다.

아니 왜 내가 매일 이런 걸 설명해 줘야 하지? 그리고 그 질문 뒤에 숨은 의도가 참 얄미웠다.


서양 사람만이 아니다. 어제는 길에서 만난 대만 사람은 한국인들은 하얀 피부(white skin)가 미의 기준이라고 들었는데 맞냐고 물어왔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당시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제대로 답을 하지도 못했다. 아니야. 우리는 "white skin"을 가지려고 하는 게 아니야. 어떤 나라도 "Clear skin"을 가지고 싶은 건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피부를 사랑해.


한국 사람들이 하얀 피부를 좋아한다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일까 궁금했는데, 오늘 아차 싶은 순간이 있었다. J가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국어를 영어로 직역하는 바람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었다.


우리는 피부 타는 거 안 좋아해. 이 단순한 말을 짧은 영어로 직역하면서 "We hate brown skin"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하얀 피부를 생각 없이 직역하면 white skin이 되고 이런 말들은 인종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이 얼마나 오해 살만한 표현들인지! 나는 서둘러 그게 아니라고 덧붙였지만 이미 그 서양 아저씨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봤다. 그 얼굴에 지금껏 비슷한 질문을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나는 조금 흥분했던 것 같다.


"종교 관련된 거 아니고 국가가 압력 준 것도 아니야.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또 처음 듣네. 햇빛에 오래 노출되면 화상(Sunburn)을 입을 수 있잖아. 햇빛 알레르기도 많고. 피부 보호하려고 그런 거야. 그게 다야."


더 이상 이 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단호하게 말을 마쳤다. 또다시 말을 꺼내려 우물쭈물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나는 최대한 그 사람과 눈 마주치지 않았다.


옆에서 포와 메그가 작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그게 뭔지 나도 알아. 나도 동양 사람이잖아. 좋든 나쁘든 여러 가지 오해를 많이 받지."


사실 그동안 좀 쌓인 것이 있었으니 그 아저씨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터질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내일 또다시 받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무례하게 질문해 댄 아저씨는 잊되, 앞으로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할지는 생각해야 했다.




이 밤 뜨겁고 평화롭기를

식사를 마치고 건물 앞으로 나가니 지역 주민들 모두 하얀 옷에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광장에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때마침 지역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우리는 운이 있구나. 옆에서 구경하는데 사람들이 저기 가면 음식도 있고 음료도 있으니 가보라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번 즐겨 볼까나? 생각해 보니 이들도 우리도 팬데믹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축제였다.


메그가 벽에 붙은 축제 스케줄을 보고는 이 축제가 새벽 5시까지 열린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에잉? 설마 정말 그 시간까지 열린다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늦은 시간까지 시끄러울 것을 감안해야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축제를 즐기다가 해가 지려고 하자 먼저 자리를 떴다. 순례길에서 해 뜨는 것은 매일 보지만 해가 지는 건 잘 보지 못했었다. 오늘은 그 풍경이 보고 싶어 혼자 조용히 마을을 거닐었다.


모두 축제를 보러 갔는지 골목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마을이 작으니 금세 구석구석을 다니게 된다.

혼자 걷는 이 시간이 좋다. 무엇에도 조급해지지 않고 묶이지 않는 시간.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또렷해지는 시간.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저 나 스스로가 되어 위로받는 시간.

생각이 조금 깊어지려고 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어느덧 해는 지고 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숙소 앞에는 순례자 두 명이 빨래를 걷고 있었다. 고조된 축제의 분위기와 공존하되 전혀 영향받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움이 그 풍경 속에 있었다. 아차차, 나도 빨래 걷어야지.

빨래를 걷는데 풀벌레 같은 시골의 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동시에 저 멀리 축제와 사람들의 환호성이 뭔가 이질적이면서도 반갑게 들려온다.

그동안 우리는 축제 있는 일상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오늘은 평소보다 늦은 시간인 9시가 넘어서야 잘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2층짜리 침대가 적어도 10개는 되었는데 대부분 자리에 없는 걸 보니 축제가 한창인가 보다. 참 다들 체력이 대단하고나. 곧이어 메그와 J도 돌아왔다. 나는 한참을 멀뚱히 누워있다. 축제의 소리가 익숙해지면 잠이 들 수 있을까. 내 옆 침대에 순례자는 나보다도 먼저 침대에 누워있더니 가장 먼저 잠이 들었다. 피곤했는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린다.


까미노에 오기 전 까미노 정보를 알려주는 한 사이트에서 순례길 에티켓 같은 걸 본 적이 있다. 그중 눈여겨봤던 문구 중 하나는 이렇다.


코 고는 사람에게 불평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일부러 코를 골지 않습니다. 코골이를 듣기 싫은 사람은 산티아고에 가지 말거나 개인실을 사용하십시오.


올레길에서 게스트하우스를 묵을 때 노골적으로 코 고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의 논리는 코를 고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개인실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끔 코를 골곤 하는 나는 그 말이 좀 억울했었다. 자기가 코를 안 곤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런데 까미노 사이트에는 '누구나 코를 골 수 있으니 개인실을 가야 하는 사람은 코 고는 사람이 아니라 코골이를 못 견디는 사람들이다'라고 하니 이제야 말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11시가 넘어도 축제는 한창이다. 방은 소등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제야 방으로 귀가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내 옆 순례자의 코 고는 소리를 듣고 킥킥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두세 명이 몰려와서 코 고는 소리를 흉내 내며 도망가는 것이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처음엔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가만히 누워서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무리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코골이 흉내 내며 키득거린다. 와 이 사람들 술 좀 마셨는지 너무하네. 휴.. 그래도 참아보자.


하지만 기어코 3번째 똑같은 장난을 치는 이 무례한 자들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숙소 직원도 사태를 파악했는지 들어와 그들을 얼른 데리고 나간다.


너무 화가 나서 맨발로 방을 뛰쳐나갔지만 이미 직원이 그들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간 후였다. 대부분 순례자가 묵는 도미토리 방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깨운 것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코를 고는 사람을 흉내 내며 그 사람을 능멸한 것에 정말 화가 치밀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나타날 때까지 맨발로 서서 기다렸다. 그 직원은 나를 이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새벽까지 들리던 음악 소리도 괜찮고 코 고는 순례자도 괜찮다. 그런데 무례한 사람들은 정말 혼 좀 나야 한다. 너네들 못됐어 정말!!


하지만 정작 코 고는 순례자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차라리 다행이다. 알았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도 잘 준비가 끝난 듯 이제 방안은 조용하다. 이 마을의 이방인들은 나 빼고 모두 잠든 것 같다. 씩씩거리던 내 숨도 점점 차분해진다.


저 멀리

사람 사는 소리가, 웃음소리가 들린다.

잠시나마 축제로 초대해 준 마을 사람들이 고맙다.


이 밤

뜨겁고

평화롭기를.



.. 그리고 축제는 정말로 새벽 5시까지 계속되었다.




Bonus!

Albergue : Hostel San And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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