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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슬킴 Jan 23. 2021

효도(孝道)에 -마광수

- 내 생각도 그러하다.


마광수, 그의 이름만 들어도 떠들썩했던 그때가 생각이 난다. 소설 <즐거운 사라>로 문제가 되었을 때, 나는 막 중학생이 되었다. 어린 나에게는 그저 야한 소설을 쓰고 욕을 무지하게 먹는 소설가(교수)로만 여겨졌고, 그 후 미디어를 통해 가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 없지만 오늘 <효도에>라는 그의 시를 읽고 마광수의 책이 읽어보고 싶어 졌다.



      <효도(孝道)에>          -마광수

어머니, 전 효도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낳아주신 은혜' '길러주신 은혜'
이런 이야기를 전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와 전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지요.
그저 무슨 인연으로, 이상한 관계에서
우린 함께 살게 된 거지요.
이건 제가 어머니를 싫어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생을 저주하여 당신에게
핑계 대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전 재미있게도, 또 슬프게도 살 수 있어요.
다만 제 스스로의 운명으로 하여,
제 목숨 때문으로 하여
전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어요.
전 당신에게 빚은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어쩌다 얽혀 들어간 사이일 뿐,
한쪽이 한쪽을 얽은 건 아니니까요.

아, 어머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난 널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이런 말씀일랑 말아주세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모든 동정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애정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차피 우린 참 야릇한 인연으로 만났잖아요?


-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자유문학사 1989)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족, 부모,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러나 가족도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된 인연일 뿐이라는 것이다. 적당한 거리도 가족 간에 더 필요하다.








검색해서 그의 이야기를 대략 읽어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2017 9 5 오후 1 51분쯤,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아파트에서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고 자살로 추정했다.
유서에는 '자신의 유산을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준다고 썼다고 한다.


 -자신의 유산을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준다.-는 말이 그가 외롭게 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긴 시간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아예 잊혀 버리고 말든지
아니면 조롱 섞인 비아냥 받으며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저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 뿐

시 <내가 죽은 뒤에는> 전문 마광수 作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글로 드러냈다고 해서 죄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조용히 있는 나(너)라고 떳떳할까? 분명 시대를 잘못 타고났고,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가기에 '교수'집단이 상당히 권위적이고 교양 있는 척을 해야 하는 직업이기에 운이 좋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조교 생활을 하면서 나름 보고 들은 것도 많다. 물론 훌륭한 교수들도 많겠지만, 글쎄...)


그는 "허례허식과 허세를 비판하며, '성(性)'에 솔직해져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는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데에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사실 성뿐만이 아니라, "매 순간의 욕구에 충실하고 장래를 기대하며 스스로를 억압하지 말라"는 식의 말을 생전에 자주 했다. 특히 내세론을 크게 비판하며 "내세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번 생이나 잘 살라"고 강조한다. 일종의 쾌락주의에 가까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며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비난한다. 자신이 피해를 입기 싫은 만큼 상대도 존중하라는 것인데, 실제로 마광수 교수 본인도 일상생활에선 그의 글과 다르게 젠틀하며 부드러운 이미지다.

그 때문인지 1990년대에는 불경한 음란 문학이라며 지탄받았지만, 현재는 그가 말한 대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중파에서 섹드립을 치는 지금과 비교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마 교수는 이미지와 다르게 학생을 성추행하거나 더럽게 굴어 문제 된 적이 없다. 마 교수 본인이 강의 중 그런 루머에 대하여 말하길, "씨 xx들이 소설이랑 현실을 구분을 못하는 거지"라고 일갈.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매너 있고 젠틀한 편이었다. 특히 시험지의 경우, 조교한테 모두 일임하는 웬만한 다른 교수보다 훨씬 신경 써서 채점하는 편이었다고.


                                                                                                 (나무위키에서 퍼옴)





아직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어 좁은 소견으로 짧은 글을 써봤다. 당장 도서관에 가서 그의 책을 빌려 읽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항상 생각하지만, 예술가로 살아가기에 이곳은 너무 좁다. 너무 막혀있다. 여전히..





화가 나혜석과 겹치는 그의 삶,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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