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스탠퍼드 - 예정된 악인, 유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깝고, 따라서 기독교 신자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존재임을 인정하며, 종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현대 사회에서 잊혀가고 있는 가치들을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성서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중하지만, 성서를 근거로 내게 논증을 시도하는 사람은 존중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선서라면 자기방어를 위해서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부터 기독교 신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일 수 있는, 이스가리옷(가룟) 유다에 대해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신자 유다를 복원 하다
숨겨진 진실이란 워딩은 크기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흥미를 유발한다. 최순실이 박근혜 정부에 어떻게 개입해왔는지부터 어제 철수가 영희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관심의 대상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합법이든 불법 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는 아득한 과거의 기억들을 추적하며 퍼즐을 짜 맞춰온 수많은 이들의 열정적인, 때로는 광기 어린 동력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과거는 어떻게든 현실에 개입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상기해보자. 재현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진실이 현재를 경유해온 흔적을 밝혀내지 않고서는 과거를 딛고 있는 현재의 우리를 설명할 수 없으며, 현실에 개입하는 과거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방기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진실을 추적하는 일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대해 나태하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역사 교육이 중요한 이유도 이와 같다.
그런데, 하나의 상징이 기나긴 역사 속에서 조직적으로 왜곡되고, 점진적으로 왜곡된 상징에 시대적 편견이 덧씌워져 대량 학살의 도화선이 되었다면, 그 문화적 유산이 우리가 오늘날 상대방에 대해 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모욕이자 낙인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면 어떤가? 피터 스탠퍼드는 그 상징이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배신의 대명사로 통용되는, 이스가리옷 유다라고 말한다. 그는 <예정된 악인, 유다>에서 2천 년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연관된 방대한 자료들을 끌어모아 끈질기게 추적한다.
<유다>는 신앙의 차원보다는 역사의 누적 속에서 유다의 모습을 복원한다.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서 다룬 <젤롯>의 유다 버전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겠다. 책은 저자가 유다의 흔적을 찾아 예루살렘에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유다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라고 알려진 하켈다마에도 유다에 대한 이렇다 할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유다의 행적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기록한 역사적 문헌이라고는 공관복음(마가, 마태, 누가)와 요한복음뿐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유다 이해하기
이 책은 성경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가설을 따른다. 공관복음 중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그다음이 마태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이 그 이후에 신앙공동체에 의해 공동 집필됐다고 본다. 즉 마가복음의 시대적 순서가 다른 것들보다 앞서므로 이후의 성경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내용들은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보는 방법이다.
감히 어떻게 예수의 말씀을 옮겨 적었다는 복음서에 이런 윤색이 가능했을까? 기독교 공동체가 2천 년 전 과거를 살고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 당시 사람들의 역사관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상력에 기반한 창작이 가미되거나 하는 등의 윤색은 문제 되지 않았다. 실제로 간결한 문체로 예수의 궤적을 쫓은 마가에 비해 마태, 누가, 요한은 마가의 이야기에 예수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덧붙인다.
이스가리옷 유다는 그 덧붙임의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에 의하면 마가복음에 기록된 유다에 대한 설명은 예수를 넘겨주기 위해 유대교 대제사장들을 찾아갔다는 설명뿐, 그 의도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리고 예수를 넘기는 대가로 돈을 제안한 것은 유다가 아니라 유대교 대제사장들이었다. 그러나 마태는 이 위에 '은화 30냥'이라는 구약에서 인용한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며 유다에게 탐욕의 이미지를 씌우고, 한편으로는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죄를 뉘우치며 은화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홀로 목숨을 끊었다고 서술한다.
이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이르렀을 때 유다는 선천적인 탐욕에 눈멀어 사탄과 손을 맞잡은 사악함 그 자체로 묘사된다.
유다가 사탄의 상징이 되어야 했던 이유를 저자는 초기 교회가 성립하던 과정에서 찾는다. 교회 역시 하나의 정치적 집단임을 상기하자. 초기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내홍을 겪었다. 기독교를 유대교의 연장선상에서 봤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유대 민족 이스라엘 교회와, 기독교와 유대교의 연관관계를 부정하고 유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했던 사도 바울의 교회가 주된 축이었다. (주류 세력은 아니었지만 영성과 지식을 중시했던 그노시스 파도 예수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수많은 갈래 중 주된 종파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청년 시절에 믿었던 마니교는 영지주의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불교가 뒤섞인 종교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영지주의 기독교가 바로 그노시스파의 영향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유대 민족과의 연관성을 부정해야 했다. 첫 번째, 예수가 유대 민족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믿음만으로 전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전 메시아로 해석돼야 외부 민족에 대한 포교 활동이 가능하다. 두 번째, 유대 민족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나면 구약의 규율을 지킬 필요가 없어지기에 이 역시 다른 민족에 대한 포교활동이 수월해진다. 이 대목에 대해 레자 아슬란의 <젤롯>에서는 초기에 야고보의 이스라엘 교회가 정통, 바울의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이후 이스라엘이 파괴되면서 다시 바울의 교회가 정통으로서 힘을 얻고, 야고보의 영향력을 대체하기 위해 베드로의 비중이 높아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유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저자는 풍부한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유다'라는 이름이 유대 민족의 탐욕과 비열함을 공격하는 집단적 모욕의 상징이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리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모두 사도 바울 교파의 추종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유다'는 '유대'인의 상징으로서 초기 교회가 유대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했던 이유가 되어야 했다. 예수의 죽음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고 예수의 사형을 언도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비중을 낮추어야 했다. 어떻게든 사도 바울의 교회 입장에서는 '유다', 즉 '유대'민족은 인류의 메시아를 배반한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마태복음에서 죄를 뉘우치는데 실패하고 홀로 쓸쓸히 목을 매달아 죽는 유다의 모습은, 요한복음과 중세의 다양한 문헌과 예술, 예수수난극 등을 거치며 '금전을 탐하고, 성욕이 넘치거나, 동성애로 타락했으며, 친밀의 표시인 입맞춤으로 자신의 스승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선천적인 사악함으로 배반을 일삼는' 상징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유다에게 부여된 이러한 특질들은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선동의 도구가 되었으며, 나치시대에 이르러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로 그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파격적인 주장은 곧 화형을 뜻하던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 현대로 이어져오며 유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대두된다. 유다의 배반이 하느님의 큰 계획 속에서 도구로서 쓰임 받았다는 주장, 사탄에 홀린 상태에서 행해진 배반이므로 온전히 유다의 책임은 아니라는 주장, 정치적 혁명가 유다로서 지상 낙원이라는 꿈같은 얘기만 설파하는 예수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배반이었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모두 '인간'이라는 굴레 속에서 고통받는 유다를 전제로 한 해석이다.
유다를 다시 생각하다
유다의 흔적을 찾아 예루살렘을 헤매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올리브나무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겟세마네 동산은 내게 이런 생각을 품게 한다. (...) 그리고 고백하자면 오래된 나무와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이 들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령이 2천 년이 넘었다는 겟세마네의 오래된 올리브나무는 정말 유다의 최후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고 있을까. 간직하고 있다 한들 그것의 진위여부가 무슨 대수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유다라는 상징을 현대까지 다뤄온 인류의 삶이다. 인류가 유다를 다뤄온 방식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은 단순히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을 인용하며 유다가 '예정된 악인'이었음을 드러내는데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유다라는 상징을 다른 사도에 비해 활발하게 다루고 있는 이유를 성경에 드러난 유다라는 캐릭터의 인간적인 측면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나 친밀한 사람에 의해 배신당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친밀한 누군가를 배신하기도 한다. 우리는 친밀한 감정이 파괴적인 감정으로 변모하고, 그것이 배신으로 발화하는 순간의 판단이 당시 상황에서의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대중은 유다에게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유다가 마땅히 비난 받아야면서도 회개하여 용서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팀 라이스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문제작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락을 베이스로 한 오페라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작품이 논쟁에 휘말린 이유는 복음서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예수를 슈퍼스타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히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다를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한 정치적 혁명가로 그려냈다는 점이 파격이었다. 그 속에서 예수와 유다가 그려내는 인간적인 고뇌는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신앙을 떠나 다층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인류의 고전임을 깨닫게 해준다.
물론 유다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개인의 판단이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간에 기독교의 역사를 추적하며 유다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 준 피터 스탠퍼드의 열정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사료들이 새로 그려내는 유다의 초상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PwDb9SG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