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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Aug 15. 2021

자유롭지 못한 여행

한정된 시간, 교통비와 숙박비를들여온곳이다. 더 잘 놀아야 한다.


자유롭지 못한 여행


기어코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없는 정자에 굳이, 벌러덩 누워있는 인간을 보라. 우리는 남편의 출장을 핑계로 함께 지방에 놀러 온 참이었다. 이곳저곳을 들르려는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는 배를 깔고 누워 바람을 맞으며 지그시 눈까지 감아보았다. 독야청청 아주 신바람이 났다. 한량이 따로 없다. 머릿속으로 시간표를 그렸다. 


"여기서 빨리 이동한 다음에는 벽화마을, 그다음에는 아인슈페너가 유명하다는 카페. 그다음에는 맛집인데 거기서 웨이팅이 얼마나 될지 모르니.." 


그런데 남편은 여전히 꼼짝을 안 했다. 남편은 나를 보며 물었다.


“거기 꼭 가고 싶은 곳이야?”

“이곳에서 여기가 제일 유명하데, 벽화도 귀엽고.” 

“너 평소에 벽화나 그림 같은 거 많이 보지도 않잖아.” 


그러게 생각해보니 왜 애초에 벽화마을을 가려고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바람이 시원하게 이마에 닿았다. '이 정자가 땀을 식히기 좋기는 한데..' 결국 몇 개의 계획은 취소하고 정자에서 한 숨을 돌렸다. 


어제도 그랬다. 바닷가 마을이니만큼 이곳에서 추천하는 특산물은 ‘해산물’이었다. 맛집도 죄다 횟집이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고기’가 먹고 싶었다. 여기는 해산물이 유명하다는데..라는 마음에 나는 억지로 해산물 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비빔밥을 먹고 얼마쯤 걸었을까. 갑자기 먹은 날것 때문인지 배가 아팠다. 결국, 바닷가를 거닐다가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호텔로 와서도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싼 오션뷰의 호텔을 잡았지만 배탈이 나서 낑낑대다가, 약을 먹고 일찍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체크아웃 시간이 1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호텔에서 호캉스도 하고 바닷가를 즐기려고 했는데 그냥 잠들어 버렸다. 


이번 여행에서는 결국 계획대로 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그래도 나는 늘 여행을 계획을 세운다. 

내 MBTI가 J라서 그럴까.. 계획은 내 인생에서 빠지질 않는다. 음식점도 A 음식점이 문을 닫았을 때를 생각해서 A, B, C 3가지나 골라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쉽사리 계획처럼 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불안하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이곳에서 꼭 해야 할 것을 못할 것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시간이 지나고서 '아 거기서 그걸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마주치기 싫은 생각이다. 한정된 시간, 교통비와 숙박비를 들여온 곳이다. 왠지 더 잘 즐겨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고 가급적 지키려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컨디션이다. 아울러 함께 온 사람의 취향과 상태이다.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해도 우리가 해물을 싫어한다면 좋은 평가가 있기 어렵다. 즐기지도 않는 벽화를 보자고 걸으면 땀만 날 뿐이다. 더 잘 놀자는 마음이 오히려 나를 힘들게, 자연스럽지 못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27살의 내가 32살의 나를 예상한 일기장을 보았다. 아마 자기 개발서를 읽고 썼던 모양이다. 거기에는 그때 상상한 미래가 쓰여있었다. 32살의 나는 해외 광고제에서 수상을 했을 것이고,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으며 외국어도 능통하여 국내외를 오가는 인재라고 쓰여있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군가? 그때는 광고로 쌓고 있던 커리어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사람이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결혼을 했고 광고일도 하지 않는다. 25살의 나는 32살의 나를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에 불만족한 것은 아니다. 포기를 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지금 걸어온 모든 길도 최선을 다해 선택한 결과였다. 하물며 삶도 그런데.. 여행은 얼마나 예측할 수 있을까? 


꼭 가지 못했던 명소도, 먹지 못했던 특산물도,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온 목적이 휴식과 즐김이라면 그때그때를 충실하게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여행의 자세는, 철두철미한 준비가 아닌. 상황에 휩쓸릴 수 있는 자유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 계획표에만 얽매인다면 오히려 여행에서 느끼는 것은 부자유뿐일 것이다.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자신의 컨디션을 배려하는 다정함, 느슨하게 일정을 수정하는 유연함, 좋은 곳이 있다면 휩쓸리는 자유로움임을 깨달았다. 계획 덕후인 나는 아직 계획을 온전히 놓지는 못한다. 다만 시간표 사이의 틈새를 느슨하게 열어두려 한다. 좋은 정자가 있으면 바람을 좀 맞으며 쉬었다 가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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